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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본학교 에세이에 대한 질문을 주고 받을 때면 나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마치 가슴을 꾸욱 누르면 말하는 인형처럼. > > "하루에 2시간은 고민해야죠. 월요일 2시간, 화요일 2시간, 수요일 2시간, 목요일 2시간, 금요일 2시간." > > 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시간 단위로 인생을 건설해주는 컨설턴트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설득력이 1도 없고 영업실적은 0에 가까운. > > 어쩌면 이건 소유적 태도에 가까운 무언가였을 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을. 나는 왜 그토록 집요하게, 더 오래 고민해보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자기개발서가 아닌 지식을 다룬 책 좀 읽어보라고 했을까??? > > 당시의 나는 내가 그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그런건 아니다. 그들이 보여준 지식의 총량은 당연히 나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에세이는 정말로 어려웠다. 답답했고, 머리는 돌아가질 않고,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사무국장님 앞에서도 어린애 마냥 징징거렸지. 다 큰 어른이 입을 삐죽거리는 광경을 객관적으로 보면 짧은 비극이지. 그것도 아주 침통한. > > 사실 나는 그들의 답안을 통하여 새로운 구조를 엿보고 싶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시각이나 내가 놓친 것들을 발견하길 바랬거든. 그런데 막상 질문을 던져보면...ㅜㅠㅠㅜㅜㅠㅜㅠ > > 여기서 기묘한 점은 그들은 빈약한 답안을 들고 너무나 당당했다는 점이다. 마치 본인이 인류 지성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쓴 것처럼 말이다. 어깨와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이 무서웠다. 솔직히 말하면 사이비 종교를 넘어 이단 종교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 > A4 한 장 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2시간을 고민한 흔적도 없는 답을 들고서,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아니, 잠깐만!! 어쩌면 이건 거꾸로일지도 모른다!! 내가 10시간 동안 매달리며 겨우 써내려간 답을 저들이 30분 만에 해결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거 어쩌면 내가 바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내 IQ는 78 정도니까.. 일리 있다. > > 나는 이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불편했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돌프 히틀러도 유대인을 이런 시선으로 보다가, 혐오로 넘어가버린 건 아닐까!?!? > > 과거의 내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은 이유다. > >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 "개인의 실패를 민족의 사명으로 위장하여,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했다." > > > 이 책을 읽으며, (히틀러가 나보다 더 무서움 ㅋㅋ) > > 이 책의 앞부분은 히틀러의 글로 시작하지 않는다. 일단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 해부한다.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히틀러에 대해 단호하게 정리한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개인적인 충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싫은 경험이 있었다고 전해지지 않는다. 그 자신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프너는 빈 시절의 청년 히틀러가 동유럽에서 흘러들어온 반유대주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물들었다고 말한다. 학력도 직업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청년이 자신의 인생 빈 곳을 메우기 위해 받아들였던 일종의 정신적 셋방에 가까운 것이다. > >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히틀러의 실적과 범죄를 분리해서 바라본다. 히틀러의 경제 회복, 재군비, 조직 장악, 대중 동원이라는 영역에서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악이라는 건 언제나 무능한 얼굴로 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실업률을 내리고, 무너졌던 거리의 질서를 정돈하고, 한 시대가 잃어버린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 > 히틀러가 나보다 무서운 이유는 단순하다. 만약 히틀러의 혐오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부실함을 오랫동안 들여보다가 천천히 자라난 것이었다면, 그 길의 입구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그런 감정이 피어날 때 멈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표지판이 박혀 있는 비탈길은 위험하다. 그래도 표지판이라도 있는 비탈길이니까. 하지만 하프너가 보는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실망해서 미워한 게 아니라, 미워할 대상이 필요해서 미워한 것이다. 인생의 공백을 채울 적이 먼저 자리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하프너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악성종양처럼 청년 히틀러 안에 깊게 그리고 집요하게 뿌리를 내렸다." 히틀러는 미워한 다음에야 그 적을 정당화해 줄 이론을 뒤늦게 따라붙였다. 순서가 통째로 뒤집힌 것이다;. > > 여기서 나와 히틀러의 차이를 발견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놓은 답안,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펼쳐놓고 답답함을 느꼈다. 내 감정의 출발점은 바깥에 있었다. 외부의 자극이 먼저 있고, 그에 대한 반응이 뒤따랐다. 하지만 히틀러의 출발점은 줄곧 안쪽에 있었다. 그는 빈의 어느 거리 모퉁에서 마주친 어느 한 명의 유대인을 보고 분노한 게 아니다. 자기 내부의 공백을 메워줄 적의 형상을 필요로 했기에, 동유럽 반유대주의에 올라탔을 뿐이다. > > 휴..일단 히틀러와 달라서 다행이다 ㅎㅎ > > > 추상과 추함 > > 내가 읽고 싶었던 내용은 1부 11장, '민족과 영혼에 대하여'에 모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만한 지점은 히틀러가 단 한 번도 자기가 실제로 만난 어떤 유대인의 어떤 행동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 한 명의 이름도, 단 하나의 일화도, 단 한 줄의 대화도 없다. 그는 처음부터 추상적인 자연법칙을 인용할 뿐이다. > > "박새는 박새한테 간다. 참새는 참새에게, 수컷 황새는 암컷 황새에게, 들쥐는 들쥐에게, 생쥐는 생쥐에게, 수늑대는 암늑대에게로 간다." (<나의투쟁>, 415p.) > > 이 문장을 얼핏 훑어보면, 히틀러가 추상적 사고에 꽤 능숙한 사상가처럼 보일 수 있다. 책 곳곳에 민중, 역사, 운명 같은 묵직한 단어들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조금만 넘기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추상적 사고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복잡성과 구체성을 들여다 보지 않은 좁은 시야의 헛소리꾼였을 뿐이다. > > 여기서 추상이란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추상적 사고를 하자.", "높은 시선을 갖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듣고 있으면 꽤 폼이 난다. 문제는 그 말을 꺼낸 사람에게 질문을 딱 하나만 던지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재미있게 살자!" 라고 말한다. 훌륭하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에게 재미란 뭔가요?" 그러면 상대방은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하던 추상적 사고, 높은 시선을 가진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해진다. 눈빛이 흔들리고,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다가 결국.. "그냥.. 즐거운 거죠."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추상적 사고의 실체다. > > 진짜 추상은 사실 정반대의 방향에서 온다. 구체적인 것을 아주 오래, 아주 집요하게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님이 판단하지 말고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피카소가 그려낸 '황소'가 대표적인 예다. 첫번째 황소는 무게감을 자랑하지만, 갈수록 살집이 사라지더니 정육점 벽에 걸린 도면처럼 기하학적 블록으로 분해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느다란 선만이 남아 있다. > > 피카소가 마지막 그림에 단 한 줄로 그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황소의 핏줄과 근육을 정직하게 그려봤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어느 근육이 본질이고 어느 근육이 장식인지를 비로소 가려낼 수 있었다. 살과 갈비뼈를 다 그려본 다음에야, 어느 뼈가 황소를 황소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선인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추상은 현실을 건너뛰는 게 아니다. 현실을 오래 들여다본 나머지 핵심만 남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재미있게 살고 싶다." 라고 말한다면 내 삶에서 재미있는 게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아주 아주 긴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월요일 2시간, 화요일 2시간, 수요일 2시간, 목요일 2시간, 금요일 2시간을 주구장창 앵무새 마냥 주장한 이유다. 비슷한 이유로 꼭 에세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아도 일상 대화나 글만 읽어도 가늠할 수 있다. 평소 생각을 깊게 하지 않으니, 에세이를 대하는 태도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최진석 교수님 또한 "야망과 필요와 감동"이라는 글을 통하여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글에 무엇인가를 많이 담으려고 애쓰지 말고, 빼려고 노력해 보라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10장 분량의 글을 써 놓고 빼는 것과, 꼴랑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 > 진짜 추상은 구체성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인내심의 산물이다. 피카소의 첫 번째 황소가 없었다면 열한 번째 뼈다귀 황소도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 월요일에 2시간, 화요일에 2시간, 수요일에 2시간, 목요일에 2시간, 금요일에 2시간씩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하고, "이 근육이 정말 필요할까?", "이 그림자가 황소를 황소로 만드는 데 기여할까?" 등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고로, 진짜 추상적 사고 그리고 높은 시선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것을 들여다보려는 인내심, 그리고 "이게 맞나?"처럼 자기 확신을 유보하는 태도. > >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분량이 방대하다. 이 점만 놓고보면, 그는 월요일 3시간, 화요일 3시간, 수요일 3시간, 목요일 3시간, 금요일 3시간 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을 언뜻 보면, 피카소의 마지막 황소처럼 심플하고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히틀러는 피카소처럼 정직하게 그린 11마리의 황소가 없다. 단 한 마리도 없다. 그는 황소 근처에도 가보지 않아놓고 냅다 줄 하나만 그어버린 것이다. > > 그의 사고에는 구체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남발하는 민족이나 운명 같은 단어를 제대로 정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추상적 사고를 한 사람이 아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묶어버리는 일반화와 단순화만 했을 뿐이다. 아래는 그 예시다. > > *** > > 우리가 항상 '여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 스스로 얻은 경험이나 인식에 입각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이에 대해 때때로 아주 한정없이 철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른바 '계몽'이라는 종류의 것에 의하여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다. > > 중략 > > 정치적 교육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는 것은 신문이다. 신문은 첫째로 이 '계몽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성인에게 하나의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이 수 업은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어떤 부분은 가장 열등한 세력의 손안에 있다. > > 중략 > > 며칠 만에 우스꽝스러운 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행위가 만들어지고, 그와 동시에 반대로 매우 중요한 생활상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망각되거나, 좀더 분명히 이야기하면 대중의 기억과 의식 속에서 간단히 도둑질해 가고 마는 것이다 > > 중략 > > 이와 같이 해서, 2~3주일 지나는 동안에 마법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름이 만들어지고, 그 이름이 민중의 엄청난 희망과 결부되어 실제로 뛰어난 인물이라도 평생 얻지 못하는 인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 중략 > > 이러한 정신적인 도둑과 같은 기사를 쓸 때 자기의 비열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 > 중략 > > 그러나 이 인간쓰레기들이 이른바 '여론'의 3분의 2 이상을 만들고 있고 그 거품에서 의회주의라고 하는 사랑의 신이 나타난 것이다. > > 중략 > > 이 미치광이같이 위험한 인간의 착란은 민주주의적 의회주의를 참다운 게르만적 민주주의와 비교하자마자 가장 손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 <나의 투쟁, 213~214p, 여론] > > *** > > 위의 글을 보면 히틀러가 나름 생각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여론이 무엇인지 정의가 되었다. 하지만 현상의 단면만 포착했을 뿐, 현장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성은 외면했다. 계몽이 무엇인지, 선전과 교육의 경계는 없다. 여론은 그저 조작된 것, 신문은 저열한 세력의 도구, 의회주의는 착란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출발한 셈이다. > 추상적 사고의 시작은 일단 자신이 사용한 말을 정의하고 개념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는 구체적이고 수고스러운 것부터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높은 시선이다. (물론 나는 낮은 시선이고.) 여기서 히틀러는 어떠했나? 사례와 구조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언론이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일부 언론의 선동, 비방, 왜곡 가능성을 신문 전체의 본질로 확대시켰다. 특정 사례에서 출발하여 제도 전체를 악으로 규정해버리는 태도인 것이다. > > 이걸 우리사회로 대입해서 보겠다. 이번 이재명 정부 헌법 개정에 대해 반대하고 싶다면, "아직 이르다.", "정치인부터 쇄신해야 한다.", "국민들이 동의할 수 없다." 같은 말은 부족하다.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 이건 추상적 사고도 아니고, 높은 시선도 아니다. 나 또한 상당히 부족하지만 굳이 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할 줄 알아야 한다. > > 이번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헌법 개정안은 위험하다. 5.18 민주화운동과 부마민주항쟁 정신의 헌법 수록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 해석의 주인은 국민이지 국가가 아니다. 헌법이 역사적 사건을 선별하여 수록하는 순간, 헌법은 또 다른 정치 갈등의 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은 시민, 사회, 학계 간의 공적 토론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지, 국가가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 >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는 3.1 운동과 4.19 혁명이 있다. 3.1운동은 대한민국의 기원과 법통을 설명하고, 4.19는 자유민주적 헌정질서가 부정한 권력에 저항할 권력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것이 5.18민주화 운동과 부마민주항쟁이 헌법 전문 수록의 정당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역사적 가치와 헌법적 기능에 있다. 5.18은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 저항,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 붕괴의 계기다. 여기서 이 두 사건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면 단순 중요함을 넘어, 3.1운동이나 4.19가 수행하는 헌법적 기능과는 다른, 반드시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5.18과 부마항쟁의 의미는 이미 현행 헌법 전문에 있는 4.19민주이념에 포괄되어 있다. > > 고로, 5.18민주화운동과 부마민주항쟁이 헌법 전문에 추가되려면, 3.1운동과 4.19가 담당하지 못하는 독자적인 기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그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저 "우리 입맛에 맞는 역사이므로 넣어야 한다."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헌법은 규범의 언어에서 정치 논쟁의 언어로 전락할 것이다. 이게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국민대통합인가? 5.18과 부마항쟁 전문 수록을 신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 > > 위 글은 상당히 부족하다. 그러므로 지적이고 추상적 사고, 높은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높은 시선으로 헌법 개정안에 반대하고 싶다면 이정도의 구체성은 들여다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본학교 에세이 또한 이러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함평의 서당개일 뿐이다. > > > 위험한 인접성이란 > > 이 책의 조반부 앙투안 비트키느의 ['나의 투쟁'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비트키느가 추적하는 건 히틀러 한 명의 정신병리가 아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약 8년 동안 이 책을 사 들고 책장에 꽂아두고, 결혼식 답례품으로 주고받았던 평범한 독일인 1500만 명의 묵묵함이다. > > 비르킨이 인용하는 1940년 한스라는 청년의 증언은 잠시 책을 덮고 사색하고 싶게 만든다. "집에는 <나의 투쟁> 이 세 권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것, 아버지가 생신 때 받은 것, 여동생이 결혼할 때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투쟁>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게잘못되었던 것입니다." > > 바로 이 지점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나의 투쟁>은 성서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신문에 인용된 한 줄을 읽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설에서 한 소절을 들었고, 거리의 팔띠에 새겨진 한 구절을 곁눈질로 보았다. 책은 존재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읽혀지고 사고되지 않았다. > > 내가 자기개발서 말고 지식을 다룬 책을 읽길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자기개발서라는 장르의 본질은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당신의 삶은 좋아집니다." 구조이다. 독자는 사고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기 바쁘다. <나의 투쟁> 또한 같은 골격으로 지어져 있다. "위대한 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혼란은 정리될 거야." 같은 구조인 것이다. 패전의 굴욕, 인플레이션의 공포, 무명으로 인한 분노 등. 이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원인 진단과 단 하나의 해법을 친절하게 제공해주는 책이다. 사유가 없고 그저 매끄럽게 설명된 책. > > > 부록 1945년 4월 29일 새벽 4시. > > 이 책은 부록마저도 충격적이다. 마치 마블 영화의 쿠키 영상에서 소름 돋는 기분이랄까. 1945년 4월 29일 새벽 4시, 베를린 지하방공호에서 작성된 '정치적 유언장'이다. 이는 그가 자살을 정확히 28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도시는 이미 폐허, 군대는 형체조차 남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 > "나는 국민을 지도하는 사람들과 그 지도 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종법의 엄밀한 준수 및 세계의 모든 국민에 대해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 즉 국제적인 유대인 집단에 대한 가차 없는 저항을 계속할 것을 의무지우는 바이다." > > 1925년에 했던 생각과 1945년에 했던 생각에 그 어떤 굴절도 없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600만 명이 살해되는 동안에, 자기 나라의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동안에, 그는 단 한 번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폭격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던 그 마지막 새벽에도 말이다. 그것이 히틀러라는 인간이고, 이것이 <나의 투쟁>의 본질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의심이라고는 단 한 체레도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 텍스트. 다시 말해, 월요일에 2시간, 화요일에 2시간, 수요일에 2시간, 목요일에 2시간, 금요일에 2시간을 생각할 수 있으나 자기 확신에 대한 경계가 1g도 없었던 것이다. > > > 당시 나에게 <나의 투쟁>이란 > > 이 책이 나에게 말한 것은 단순하다. 혐오는 누군가를 만난 자리에서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혐오는 자기를 의심하기를 멈춘 자리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 > 당시 내가 이 책을 읽고 도달한 결론은 단순하다. 일단 이단 종교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두려워해도 괜찮다. 그들을 바라보며 피어나는 답답함도 괜찮다.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안전하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자리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다. 다시 말해, 의심이 사라진 자리. "이건 자명한 일이야."라고 결론 내리는 그 지점이 위험한 자리다. 그 자리는 1,500만명의 독일인이 <나의 투쟁>을 읽지도 않고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자리이자, 1945년 4월 29일 새벽 4시, 베를린 지하의 어느 콘크리트 책상 앞이라는 자리이기도 하다. > > > 마치며 > > 나는 그들의 에세이 결과물 그 자체보다, 에세이를 마주하는 태도 또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태도 자체에 실망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실망하는 내 소인배 같은 모습이었지. 그래서 <나의 투쟁>을 펼쳤다. > >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정치학자 최연혁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을 통해 적지 않은 위안을 얻었고, 동시에 내 안에서 단단하게 굳어 가던 소인배 같은 생각의 모서리를 조금 깎아낼 수 있었다. 다듬어진 결론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 "에세이를 쓰거나, 어떤 사안을 두고 생각할 때, 월요일 2시간, 화요일 2시간, 수요일 2시간, 목요일 2시간, 금요일 2시간을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더 좋은 답을 내기 위함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자기 확신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자기 확신이라는 괴물로부터 나를 지켜내고, 나의 시선을 한 뼘이라도 더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 > 위와 같은 답을 내고 혼자 만족하고 있을 때 즈음에 정치학자 함재봉 교수님을 만났다. > > 그분의 첫인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딘가 미묘하게 언짢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미간이 살짞 찌푸러져 있었는데, 그냥 찌푸려진 정도가 아니다. 미간에 작고 보이지 않는 호두 한 알을 끼워 두고 일주일 동안 빼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 순간 나의 두뇌는 평소처럼 쓸모없는 가설들을 호출시키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아침 식탁에서 사모님께 콩자반을 둘러싼 반찬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출근길에 누군가가 함재봉 교수님의 발등을 밟고도 사과하지 않고 사라진 건 아닐까. > > 함재봉 교수님의 신체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키는 크고, 허리는 자처럼 꼿꼿하고, 짝다리는 짚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따. 흡사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직각자를 들이대고 일일히 각도를 맞춘 다음, 그대로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정도로 단정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계셨다. 신체적인 결함과 일그러진 미간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 >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혹시 지금의 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함재봉 교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여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생리통을 아주 아주 심하게 앓는 여성.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이 바로 그 끔찍한 날이어서, 함재봉 교수님의 미간이 저토록 강렬하게 일그러져 있는 게 아닐까? 이 가설은 당시의 나에게는 상당히 그럴싸 했다. > > 일단 이 가설을 세워둔 상태로 나는 자발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성의 폐경기는 대략 몇 세 즈음이더라?", "폐경기 무렵에 찾아오는 생리는 평소보다 더 아픈가?" 그렇게 나는 아주 지적이면서 진중한 표정으로, 산부인과 학회에 참가한 산부인과 의사로 빙의하여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그런데 함재봉 교수님의 한 마디에 이 모든 질문들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함재봉 교수님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트렌스젠더든, 먼 행성에서 출장 온 외계인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분이 지금 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굴리고 있던 불편함을 대신 말해주셨기 때문이다. > > 함재봉 교수님의 말씀은 요즘 한국 언론인들이 긴 글을 좀처럼 쓰지 못하고, 독자들 역시 긴 글을 좀처럼 읽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셨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영국의 가디언에 견주어 보았을 때, 한국 매체의 글은 턱없이 짧고 빈약하다는 것이다. > > 이이.. > > 나는 당시 <한국사람 만들기> 1~2편은 중고책으로 구매했었다. 하지만 그 분의 말을 듣고 나서는 <한국사람 만들기> 3~5편만큼은 반드시 새 책으로 구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마음 속으로 결제 버튼을 정말 연달아 눌렀는데,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나의 카드 한도를 걱정했겠지? > > A4 한 장 조차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 2시간 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바라봤을 때의 답답함을 곱씹고 또 곱씸어오며 <나의 투쟁>을 읽었던 나... ㅜㅠㅠ 그런 나와 정확히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어른을 발견할 수 있다니!! <한국사람 만들기> 뿐만 아니라 앞으로 출간할 함재봉 교수님의 책은 무조건 새 책으로 구매할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면 일단 좋아요부터 누를 것이다!!!!!!!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오래 오래 생각했다. 내가 그곳에서 줄곧 마주해 온 것이 어쩌면, 특정한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실이자 평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저조해 보이는 평균값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시름시름 앓게 만드는 질병이 아닐까..? > > 이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빙글뱅글, 빨래 건조기 안에서 영원히 회전하는 양말 한짝처럼 돌아갔다. 덕분에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눕기만 하면 생각이 바글바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집으로 와서 눕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날 5만 보를 걸었다. > > 끓어오르는 생각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일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누군가는 이를 조울증 초기 증상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그렁데 나는 이 과정이 재미있었다. 고로 내 나름대로 자가진단하자면, 생각중독증 초기 증상에 가깝다. 만약 정신의학계가 내 의견에 반발하고 싶다면, 일단 판단은 유보하고 <나의 투쟁>이나 읽고 느낀점 공유해줬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각 좀 얻고 싶거든. > > 그런데 잠깐. > > 만약 내가 마주한 것이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질병이라면? > 생각해보니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실망감 단 하나가 아니었다. 이단 종교인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공포감과 섬뜩함이었다. 어쩌면 페스트, 코로나를 처음으로 마주한 의사들과 비슷한 감정이겠지!?!? > > 실망감이라는 건 어느정도의 기대가 남아 있을 때의 감정이다. 나는 기대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생각하지 않고 생각했다고 믿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들 눈빛이 또렷하고 확신이 넘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끄덕여주는 모습. 사유 없는 확신은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상태로 창문이 모두 막혀 있는 방과 같다. 이것이 내가 느낀 답답함의 성격이다!!!! > > 한 명이었다면 괜찮다. 이 세상에는 별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여럿이었따!!!!! 각자 다른 자리에서 각자 다른 표정으로! 동일한 구조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건 한 사람의 미숙함이 아니다! 하나의 증상! 질병이다!!!!! > > 아!!!!!!!!!!!!! > > 이거 위험해지는 것 같다... 이러다 히틀러처럼 될지도?? > > <나의 투쟁> 다시 읽으러 가야지 ㅎㅎㅎ > > 이 책 다음으로는 김형효의 <마음 혁명> (살림, 2007)을 통하여 최진석 교수님이 "여명의 철학자"라는 글에서 풀어두신 김형효 교수님과의 대화를 들여다 보는 글을 써보려고 했다. 마치 간첩이 몰래 도청하는 것처럼. > > 며칠 전 지인과 짧게 전화하다가, 내가 이 곳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따 ㄸ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문체만 봐도 알 것 같다나 뭐라나 ㄷㄷㄷㄷㄷㄷㄷ > > 난 다시 히틀러처럼 지하 방공호에 잠시 숨어 있을 것이다. > (물론 히틀러가 머물렀던 그 방공호처럼 음울한 콘크리트 벽 사이가 아니라, 책과 시원한 밀크티 한 잔이 놓여있는 아주 평화로운 곳이니 걱정하지 않길 바란다.) > > 그럼 2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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