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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트 혹은 대중가요는 예술이 아니다, 상업성을 띠면 예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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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가영 (123.♡.33.101)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3회   작성일Date 25-08-24 02:36

    본문

    트로트 혹은 대중가요는 예술이 아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독창성과 고유함을 바탕으로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때 사고는 확장된다. 


    사랑을 예술적으로 그려낸 문학은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김치찌개를 예술적으로 조리한 요리는 김치찌개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다시 생각하는 과정에서 감동과 즐거움, 카타르시스, 위로 등의 감정이 따라오며 시선과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이는 삶을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맛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반면 트로트와 대중가요는 감동과 위로, 즐거움, 카타르시스를 안겨다줄 수는 있으나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데에는 제한적이다. 고로 트로트와 대중가요는 예술이라 말하기 어렵다. 


    카타르시스, 감동, 위로를 안겨줬다는 이유로 트로트와 대중가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어느 남성이 3L의 물을 마시고 33시간 동안 소변을 참다가 한 순간에 배출할 때 쾌감과 카타르시스 그리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 오줌은 예술인가? 용돈 100만 원을 쥐어주는 우리 엄마, 번지점프, 길거리 쓰레기 더미 등을 모두 예술이라 할 수 있나? 다시 말해 대중가요와 트로트를 통해 느낀 기쁨, 감동, 위로, 카타르시스는 예술적 체험과 유사한 것이지 예술이 아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누군가는 자연을 에술 그 자체라고 말하지만... 더 길어지니 괴테의 말로 대체하겠다.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꽃으로 화환을 만들면 예술."


    예술의 핵심 가치는 고유함과 독창성이라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다움의 시작은 모방이 끝나는 곳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를 조금 바꾸면 "예술의 시작은 모방이 끝나는 곳이다." 하지만 트로트와 대중가요에서 고유함과 독창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트로트와 대중가요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멜로디와 리듬, 창법 등 익숙함과 친근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사는 대체로 사랑과 이별, 위로로 채워진다. 이는 감동과 즐거움, 위로, 카타르시스를 안겨다줄 수 있지만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이는 회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살롱 화풍이 유행할 때 화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비슷한 구도와 색체, 주제를 반복적으로 그려냈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익숙한 역사, 신화, 영웅 등을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하며 만족할 뿐이었다. 고로 트로트와 대중가요가 미워서 예술이 아니라고 하는 게 아니다. 회화 또한 같은 이유로 쉽게 예술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문학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한국문학이 일본문학에 비해 예술성이 뒤처지고 세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한국문학이 대중가요와 트로트와 같은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문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우리가 좋아하는 감정과 인식을 반복하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권선징악형 이야기 그리고 특정 교훈과 가치관을 주입하려고 한다. 대체로 한국문학은 대중가요와 트로트처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문학은 다르다. 과거 일본 1,000엔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인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통하여 일본의 역사나 교훈을 전달하여, 특정 감정과 인식을 반복 재생산하도록 구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내밀한 심리를 고양이라는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역사나 촌스러운 교훈이 아닌, 인간이라는 보편 주제를 다뤄 세대와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세계성을 확보한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와 한강의 작품은 예술에 가까운가?" 내 답은 '아니요'에 가깝다. 이유는 앞서 한국문학이 예술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물론 훌륭한 작가이기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사유를 들여다 보면 기존 문학의 틀 안에서 변주한 서사에 가깝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특정 작가를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술의 기준은 단순 사회적 영향력과 수상 여부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줬는 가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와 한강의 작품은 훌륭하고 가치가 있으나, 내가 정의한 예술에 부합하지 않을 뿐이다. (한강 작가님 최고!! 항상 건강하세요!! 다음에는 노벨 평화상도 받으셨으면 좋겠다! 화이띵띵띵!!)


    이쯤되니 예술 감별사, 예술 대법관이 된 기분이다. 그러니 권한과 권력을 조금 더 만끽해야겠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예외로 보이는 사례가 있다. 대중가요 중에서도 독창성이 깃든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힙합, 재즈, 락과 같은 장르의 음악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웅산의 <오늘>이란 노래도 이에 포함된다. 이 노래는 작곡 웅산, 작사 최진석으로 전통 민속 악기와 음색을 현대적으로 편곡하였고, 시적인 언어가 가사에 녹아들었다. 이 지점에서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은 대체로 상징과 은유라는 언어를 품고 있다. 추상화의 빨간색이 정열, 죽음, 사랑, 노을 등의 상징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신호등의 빨간불은 '멈춤'이라는 신호만 품고 있다. 웅산의 <오늘> 가사는 상징과 은유라는 예술적 언어로 채워져 있다. 가사 속 "오늘"은 상징, "너는 오늘이야.", "내일은 신기루"는 은유다. 가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청자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웅산의 <오늘>이라는 노래 자체는 추상화의 빨간색이라는 상징보다 신호등의 빨간색이라는 신호에 더 가깝다. 그 이유는 이 노래를 듣자마자, "아,, 삶은 소중하구나.. 오늘을 소중히 여기자~!~!!" 같은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형식은 고유성이 없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정형화된 리듬이라는 대중가요, 트로트와 동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웅산의 <오늘>은 예술이 아닌, 사유를 일으키는 대중가요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고로, 트로트와 대중가요는 예술이 아니다. 




    "상업성을 띠면 예술이 아니다."


    "상업성을 띠면 예술이 아니다." 라는 말은 다소 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이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아이들의 그림 중 몇몇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상업성을 띠지 않았으니 예술이겠네?". 그런데 예술작품은 단순 익숙함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준 것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 가장 먼저 의도적으로 탐구하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난 앞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차용하여 "예술의 시작은 모방이 끝나는 곳이다." 라 주장했다. 모방이 끝났다는 건 누군가를 따라하지 않고, 개인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아이들이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스스로 탐구한 끝에 드러난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부분 본능과 직관에 의존한 우연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작품은 예술이라 보기 어렵다. 


    다시 상업성과 예술성의 관계로 돌아가자면 이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연예계 시상식을 보면 배우가 가수와 예능인보다 더 나은 존재처럼 대우 받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는 인기, 화제성과 관계 없다. 배우는 비교적 상업성이 덜한 영역에 속한다면 가수와 예능인은 상업적 영역에 더 깊게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MAMA(엠넷 아시아 뮤직 어워드)에서 발생한 차별 대우 논란이 이를 잘 보여준다. MAMA의 주인공은 가수임에도 그들은 차 안에서 식사를 해결했다면, 배우들은 대기실에서 케이터링을 제공 받았다. 이러한 차별이 달갑지 않지만, 배우가 가수보다 덜 상업적이고 예술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대우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상업성의 정도가 예술의 위계로 연결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시선은 배우와 예능인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백술예술대상에서 유재석이 대상을 수상했을 때 몇몇 배우는 박수를 쳐주기는 커녕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반면에 영화 부문에서 유재석보다 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이 대상을 받자, 배우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는 예술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상업성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가수와 예능인은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판매량 또는 시청률이라는 실적을 추구하는 상업성에 종속되어 있다면, 배우는 꼭 그렇지 않다.


    물론 배우도 드라마 시청률 또는 영화 관객수라는 성적에 집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수와 예능인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배우는 가수와 예능인과 다르게 대중의 사랑에 반할 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에게 등짝 맞을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상업성과 거리를 둘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같은 극악무도한 악역을 택하기도 하고 사회적 논란을 부를만한 베드신 연기가 대표적이다. 대중의 거부감과 비난으로 인해 광고 계약이라는 돈줄이 끊길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간 또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표현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관계는 인터넷 방송인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예능인과 가수가 인터넷 방송인보다 더 예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게 대표적이다. 그 이유는 인터넷 방송의 방향은 실시간 후원금과 조회수 그리고 구독자의 수로 연결되어, 노골적으로 상업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터넷 방송 콘텐츠를 예술적 행위가 아닌, 콘텐츠를 생산하는 상업적 행위로 여겨진다. 사회에서 은연 중에 드러난 배우 > 가수, 예능인 > 인터넷 방송인이라는 예술적 위계를 보면 알 수 있듯, 예술과 상업성은 반비례한다. 다시 말해, 상업성을 띠면 예술과 거리가 멀어진다. 이미 사회에서도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예술은 하나의 창조 행위인 만큼 특정 목적을 품고 있지 않다면 상업성은 특정 목적을 품고 움직인다. 예술은 아주 순수하게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데 무게를 둔다면, 상업성은 소비자의 취향을 충족시켜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무게를 둔다. 그러므로 상업성을 띠고 있는 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의 탈을 쓴 상품에 가깝다. 어린시절 새뱃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과거의 나를 향해 우리 가족들이 아티스트라고 부르지 않았던 이유도 이에 기인할 것이다. 


    상업성은 예술성을 띤 자유와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표현은 규격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순수 창작이 아닌 소비를 위한 생산에 가깝다. 인터넷 방송인 보다 가수와 예능인이 더 예술적으로 보이고, 가수와 예능인보다 배우가 더 예술적으로 보이고, 배우보다 영화 감독, 영화 감독보다 작가가 더 예술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예술은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며, 상업성은 예술의 본질을 질식시키는 요소다. 여기서 누군가는 내 생각에 반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맥도날드의 브랜드 이미지 개선 목적의 광고를 위해 미켈란젤로가 조각상을 제작하고, 모차르트가 CM송을 작곡했다면, 이 둘은 예술인가?" 이에 대한 답은 쉽다. 우리 대한민국의 대문호 한강 작가의 작품도 예술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정도야 껌이지. 미켈란젤로와 모차르트가 오직 대중만을 바라보며 조각, 작곡했다면 예술이 아닌 상품이다. 반대로 맥도날드에게 위약금을 낼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유지했다면 예술이다.


    생각해보니 앞서 대중가요와 트로트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연예인으로 설명하니  설득력이 떨어진 것 같다. 그러니 오피스 빌딩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추가해야겠다. 오피스 빌딩은 철저하게 상업성을 추구한다. 임대 효율 그리고 수익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공간은 직사각형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오피스빌딩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임대인들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줄 것인지에 관심이 없다. 오직 효율적인 관리 그리고 임대 계약을 통한 안정적인 수익이다. 


    반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오피스 빌딩의 직선과 다르게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다. 딱 봐도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고, 관리하기도 벅차 보인다. 내부 공간 또한 예측하기 어려운 동선으로 이어져 길 잃은 아이를 양산하기 좋다. 그런데 이는 서울시의 세금을 축내고, 방문객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직사각형이라는 도심 속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오피스빌딩과 DDP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과 상업성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DDP는 다소 불편하고 비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반대로 오피스 건물은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지만 그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 수긍한다. 


    고로 상업성을 띠면 예술과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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