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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미셸 푸코, 김광철(옮긴이),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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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졸업생 (123.♡.33.101)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4회   작성일Date 26-05-01 21:03

    본문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나온다. 한 아파트 건물을 통째로 들여다 보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인간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부자 동네가 아닌데, 초고가의 스포츠카 자주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뭐하는 사람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조르주 페렉 또한 나와 비슷한 궁금증, 답답함을 품으며 <인생사용법>을 쓴 게 아닐까 같은 생각을 갖다보니 문체가 지루해도 계속 읽게 된다. 물론 이 작가를 사랑하는 게 가장 크겠지.

    <인생사용법>을 읽고나면, 자연스럽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궁금해진다. 그 호기심이 나를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로 이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책을 읽었고 그게 더 와닿았다. 그런데 그 책은 소개하기 싫다 왜냐명 나만 알고 싶거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공감할 것이다. 함평에 있는 최진석 교수님의 공간을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교수님이 직접 고른 책이 아니라 선물 받은 책들이었따.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교수님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사진으로 다 찍은 다음에 따라 읽으려고 했는데. 상당히 아쉬웠다. 

    그런데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내가 어떤 창으로 세상을 보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에 관해서는 입을 다무는 편이다. 배우 문가영 씨도 나와 비슷하던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인 듯 하다. 누군가가 어떤 책을 읽냐고 물으면, 아주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야동을 자주 본다고 답한다. 효과는 좋다.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입을 다물고, 내 주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고립과 함께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지.

    물론 이 야동이라는 콘텐츠를 파고들면, 인간에 대해 색다르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인간의 성적 판타지를 어떠한 도덕적 잣대 없이,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처럼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같은 책을 살피는 사람에게 야동은 생각 외로 훌륭한 학습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서양 야동은 대체로 직선적이어서 좋은 학습 자료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 야동은 난해하면서도 전위적이다. 가끔은 설명하기 힘든 장르가 튀어나오곤 한다. 이 지점에서 순수한 탐구 정신은 일본 쪽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글이 길어지니까 생략해야겠다.

    무튼 나는 일본의 난해한 야동을 최진석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아주 진지하게 설명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뭐랄까.. 그 분이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교육 철학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교수님의 표정을 약간의 유머와 오바를 곁들여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도 많이 늙었구나.. 내가 이런 녀석을 뽑았다니.. 이제 운전면허증도 반납하고 기본학교도 뒤로하고 고산봉으로 들어설 때가 된 건가..’ 

    그 표정 하나로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도 입을 꾹 다물고 살아야겠다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200년 전쯤에 막 만들어진 개념이고 곧 사라질 운명이다.”

    책에 대하여

    이 책은 재미없다. 그럼에도 읽게 되는 이유는 미셸 푸코의 집요함에 반할 수밖에 없기 대문이다. 그의 작업 방식은 집요한 탐정에 가까웠다. 칸트가 1798년에 출판한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의 진짜 집필 시기를 알아내기 위해 명탐정 코난에 준하는 추적을 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후펠란트라는 의사에게 보낸 편지부터 모스카티라는 이탈리아 해부학자의 논문에 대한 1771년의 짧은 논평, 캐나다 북극을 탐험한 선언 새뮤얼 헌의 여행기 독일어판이 1797년에 비로소 나왔다는 사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떄 사람의 키가 1/2인치 정도 더 크다는 칸트의 메모 등등. 이런 자잘한 단서들을 다 끌어모은 다음 답을 낸다.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의 집필 시기는 1797년 상반기, 3월 또는 4월”. 이정도의 집요함이라면 세금 신고는 물론이거니와 실종 사건을 맡았어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다.

    미셸 푸코가 의처증에 걸린 남편처럼 칸트를 집요하게 파헤친 이유는 학술적인 자기만족을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묻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왜 25년 동안이나 인간학 강의를 했는가?”였다. 칸트는 평생 자기 동네인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람이고 산책 시간이 너무나 정확해서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람이 25년 동안 매년 겨울학기마다 ‘인간학’이라는 강의를 했다. 25년. 한 학생이 입학해서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그 아이가 다시 같은 강의를 들을 정도의 시간이다. 칸트는 도대체 왜 그렇게 인간에 대해 오래 떠들었을까? 푸코의 답은 다음과 같다. 칸트는 평생 한 가지의 질문에 사로 잡혀 있었다.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인간을 인간 자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의 크기를 젤 때는 항상 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자가 없다면? 그 물건은 그 물건 자기 자신으로 재야 한다. 칸트가 하려던 게 바로 그거였다. 인간을 신이라는 자가 없이, 인간 그 자체로만 설명하는 것. 그래서 칸트 이후로 인간은 처음으로 ‘유한한 존재’ 그 자체로 명명된ㄷ . 더 이상 신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냥 자기인 존재로.

    이 책에서 빛나는 대목은 칸트의 <인간학>과 <비판> 사이의 관계를 묘사할 때다. 두 책은 서로 명시적으로 인용되지 않으면서도 마치 사이가 틀어진 형제 같은데, 푸코는 여기서 같은 구조를 발견했다. 그리고 “인간학적 비판철학적 반복”이라 불렀다. 그 반복 속에서 칸트 사상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세 가지 개념을 끌어냈는다. 원천(Quelle), 범위(Umfang), 한계(Grenze).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부터 알고, 어디까지 알고, 어디서 그치는지. 이 셋은 칸트의 <논리학>에 등장하는 네 가지 물음 그리고 칸트가 죽기 직전까지 쓴 <유고>의 신, 세계, 인간이라는 세 개념과 호응하면서도, 비판서 세 권 전체를 단어 세 개로 압축시켰다. 칸트라는 거인의 작업물을 세 개의 단어로 정리하는 푸코의 탁월함 그리고 추상화 능력을 보고 있자면, 이 재미없는 책을 계속 읽게 만든다. 뭐라도 하나 건질 것 같거든.

    그런데 푸코는 인간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경험적 초월적 이중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보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다. 거울 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거랄까? 어딘가에서 무한적으로 반복되는 이상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이상한 그림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근대 인간의 정체다. 자기를 알려고 하는데, 자기를 알려는 그 자기가 또 알아야 할 자기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25년이나 강의를 했지만, 푸코가 보기에 칸트는 절반만 성공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를 완벽하게 들여다보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푸코는 칸트가 흄을 통하여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고백한 구절을 살짝 비틀어서, 우리는 이제 니체를 통해 인간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라고 말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을 때 사실 그건 신만의 사망 선고가 아니었다. 신이 죽으면 신을 기준으로 만들었던 인간이라는 개념도 함께 죽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가게가 망하면 그 가게의 단골손님이라는 신분이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푸코는 책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질문 자체를 폐기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그렇게 푸코는 6년 뒤에 <말과 사물>에서 이를 더 시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처럼 파도에 씻겨 사라져버릴 것이다.” 멋있긴 한데 조금 짜증난다. 나는 헤피엔딩이 좋거든.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이폴리트라는 사람이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칸트보다 니체에게서 더 영향을 받은 듯한 역사학적 서설” 고로, 이 책은 칸트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니체적 선언서에 가까우면서, 칸트를 진지하게 읽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 칸트보다 니체가 더 궁금해진다.

    이 책이 말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200년쯤에 발명된 상품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지만 그 시도는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울놀이라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이라는 거대한 부모로부터 막 독립한 10대 같은 존재인데, 그 부모가 죽고 나니 자기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어쩌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대 위에 잠시 올라간 단역 배우 같은 존재다. 매우 진지하게 자기 대사를 외우고 있지만 사실은 무대 자체가 철거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펼쳤는데, 호기심의 대상 자체를 흔들어버린 책.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마치며

    사실 이 책은 과거에 읽었던 책이다. 아마 기본학교 에세이를 쓰기 전 즈음이었을까? 물론 이 책을 한 번 읽었다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좋은 답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칸트와 푸코처럼 꾸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는 자세가 기본값으로 갖춰지게 된다.

    물론 이 기본값으로 인한 부작용이 있다. 가장 큰 부작용은 몇몇 동지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혼자 실망하는 것이다. 다른 기수를 만날 때마다 에세이를 어떻게 썼는지, 시간은 어느정도 투자했는지, 분량은 어느정도 였는지, 쓰기 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지 같은 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허탈했다. 어쩌면 내가 문제인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기수의 한 동지를 보고 이 비뚤어진 시각이 조금은 교정되었다. 그분은 정말이지 모든 게 작았다. 우리 기수에서 키가 제일 작았고 체구도 제일 작았고 목소리도 제일 작았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려면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춘 상태로, 몸을 폴더처럼 접어서 그분의 입술 근처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나보다 동생인 줄 알고 귀엽게 봐주고 있었는데, 졸업 후 알고보니 나보다 연장자셨다.

    그런데 그 작고 조용하신 분은 본인의 에세이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졸업 후에 꾸준히 운동을 하고 주말마다 독서를 하고, 글쓰기 모임까지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분이 우리 기수의 거인 무리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못 본지가 꽤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키는 한 2m 32cm 정도, 몸무게는 138kg의 거구로 무럭무럭 자랐겠지.

    다시 돌아와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라는 책을 읽으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답해야 할 것인지 방향이 잡힌다. 핵심은 은유와 추상화, 진실함이다. 푸코가 칸트의 <인간학>과 <비판> 사이의 관계를 “인간학적 비판철학적 반복” 이라고 묶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질적인 두 텍스트 사이의 닮음을 은유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칸트 사상을 떠받치는 세 기둥인 원천Quelle, 범위Umfang, 한계Grenze를 끌어낸 건 추상화의 결과다. 두꺼운 칸트 전집을 단어 세 개로 압축해 버리는 능력. 이건 그냥 머리가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크게 네 축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원천Quelle으로서의 나로 답하려면 은유할 줄 알아야 한다.

    이때의 나는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것들이 합쳐진 결과다. 내가 읽은 책, 살고 있는 동네, 마주친 사람들, 흘려들은 말들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섞이고 있다. 다만 이 섞임은 내가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작업이 아니다. 마치 강물이 모래를 옮기고 모래가 강의 흐름을 바꾸는 것처럼, 세계가 나를 흔드는 동시에 내가 그 흔들림을 다시 정리하는, 수동성과 자발성이 함께 작동하는 일이다. 이걸 설명하려면 직접적인 언어로는 부족하다. 강물이든 직조든 양조든, 어떤 비유 하나를 끌어와야 비로소 이 합쳐짐의 결이 보인다.

    범위Umfang로서의 나로 답하려면 추상화할 줄 알아야 한다.

    범위Umfang로서의 나는 정해진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다. 내 자유는 무한하지 않다. 이미 주어진 시대, 이미 주어진 언어, 이미 주어진 관계, 이미 주어진 몸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빽빽한 제약 속에서도 어떤 역할을 어떻게 연기하느냐는 여전히 내가 정한다. 푸코는 이걸 유희라고 불렀다. 나는 이 지점이야말로 추상화 능력이 필요한 자리라고 본다. 내가 처한 수많은 구체적 상황인 학교, 가족, 일, 동네 등등 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의 무늬를 발견하지 못하면, 내 자유의 진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끝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계Grenze로서의 나로 답하려면 진실함이 갖춰져야 한다.

    나에게는 이 진실함이 가장 어려웠다. 사무국장님도 나에게 이 부분을 지적하셨거든. 한계Grenze로서의 나는 끝내 닿지 못하는 무언가를 안고 사는 존재다. 나는 나 자신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모든 진실에 도달할 수 없고, 영원히 살지도 못한다. 그러나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이 한계는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끝이 곧 시작이 되는 굴곡이다. 산을 오르다가 능선에 도달했을 때 길이 끝난 게 아니라 새로운 풍경이 열리는 것처럼. 다만 이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건 추상화도 은유도 아니고 진실함이다. 닿지 못하는 것을 닿은 척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 않고, 자기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정직함. 이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졸업 후에 자신의 한계를 알고 운동과 독서, 글쓰기를 하는 그 작은 동지가 커보이는 이유다. 

    경험적 초월적 이중체로서의 나

    이때의 나는 보는 자이자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다. 데카르트였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깔끔하게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와 푸코를 거치고 나면 이렇게 단정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생각한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결론이 곧장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사유 아래에는 늘 사유되지 않는 그림자가 깔려 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나를 완전히 알 수 없으며, 내 안에는 손전등을 아무리 비추어도 끝내 어두운 방 한 칸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남아있는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같은 질문에 스스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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