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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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잘 드는 벤치.
무용과 출신 서영이는 가볍게 스텝을 밟는다.
요즘 그녀는 표현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연습실 거울 앞에서 추는 춤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이제는 손때 묻은 노트에 문장을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서영이는 무채색의 분위기를 풍기는 방식이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갔다.
“방식아! 너 책 좋아하지?”
방식이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좋아하진 않아. 그냥 읽는 거지.”
“나 시쓴 거 있는데 한 번 봐줄래?”
서영이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신감과 함께 미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제야 방식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묘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되물었다.
“뭐.. 쉬를 쌌다고? 언제? 그런데 왜 나한테 온거야?”
“.. 야이 미친놈아!"
서영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등 뒤로 메고 있던 가방으로 방식이의 어깨를 가볍게 후려쳤다.
방식이는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시? 미안. 네가 시를 쓸 확률보다 쉬 쌀 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 그랬지.”
“됐어. 내 잘못이지. 네 눈엔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서영이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방식이는 은근슬쩍 그녀의 손목에 들린 노트를 가로채 가져갔다.
“그래, 시 좀 볼게.”
방식이는 조용히 노트를 넘기며, 서영이의 문장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음.. 벚꽃을 보고 쓴 시구나?”
“응. 어때? 솔직하게 말해봐. 감성만 앞선 건 아닌지 봐달라는 거니까.”
서영이는 긴장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방식이는 노트를 덮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벚꽃이 예뻐서 쓴 거야?”
“응! 다 읽었지? 어때?”
“그런데 서영아, 너는 벚꽃보다 거울을 보면서 시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또 무슨 말 하려고 미친놈아.”
“아니. 벚꽃보다 네가 더 예쁘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야.. 너 왜 갑자기 분위기 잡아? 자존감 지킴이 코스프레야?”
“응. 지켜줘야지. 여기서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너의 자존감 박살날 수 있으니까. 물론 내 취향이니까 귀담아 듣지는 마. 나도 시는 진짜 진짜 심심할 때 아주 아주 가끔 읽기만 하거든. 쓸 생각도 없어.”
방식이는 다시 시니컬한 말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나불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일단.. 나는 꺠끗하고 고요한 시골보다 시끄럽고 더러운 도시가 좋아. 오물 속에서 황금을 찾는 게 더 재미있잖아. 글도 그래."
“그래서? 내 시는 여백이 많아서 재미없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서영, 너는 어느 공간에 머무르고 싶어?”
그녀는 방식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방식이는 먼 산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입구와 출구가 여러 개인 곳이 좋더라. 이 길로만 가라고 강요하는 공간도 싫고. 그건 초대가 아니라 굴복시키는 거잖아. 생각 안 하고 따라가면 되니까 편하긴 하겠지. 그런데 나는 길을 잃을 수 있는 게 더 재미있어."
서영이는 어느새 방식이의 헛소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서영이가 보이스 피싱에 2번이나 당한 이유겠지.
"출구가 하나 뿐인 공간도 다시 찾지 않게 되더라고. 이미 다 본 풍경을 뭐하러 또 보겠어? 한 번 소비하면 끝나는 거야. 돌아올 이유도, 그리워 할 그림자도 없지. 문도 그래. 활짝 열려 있는 것보다 적당하게 닫혀 있어야 해. 그래야 그 틈새를 훔쳐볼 때의 짜릿함이 있거든. 공포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물론 나는 공포영화 안 봐."
서영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하.. 말 진짜 많다.. 그래서 내 시는 어떠냐고..”
“내가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내가 좋아하는 시의 스타일이아.”
“아, 그러니까 해석의 여지를 넓혀라.. 뭐 그런 비평인거지?"
“음.. 모르겠어. 바보라서. 그런데 내가 시집을 여러 권 샀는데, 재미있는 시인은 드물거든? 만약 네가 나에게 재미있는 시를 쓴다면, 넌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지. 결론은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걸 보면서 써봐.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너는 너 자신을 보면서 쓰면 좋겠어. 너는 그 어떤 꽃보다 예쁘거든."
서영이는 방식이가 건넨 노트를 품에 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 시가 별로라는 거지?”
“응. 네 시는 별로고, 여섯 시가 적당할 것 같아.”
“야.. 재미없어 진짜. 그만 좀 해.”
그렇게 방식이는 시에 대한 평가를 뒤로하고 제육볶음을 박살내러 서영이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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