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조조는 덕이 있는 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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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님은 덕이 있는 사람을 예로 들 때 삼국지의 조조를 자주 말씀하신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갈증 그리고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갈증은 다음과 같다. 황건적 이야기 외에 조조의 어느 구석이 덕을 갖춘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의 가족을 말살한 조조를 덕이라고 볼 수 있나?
궁금증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조조는 동탁의 뒤통수를 치려다 실패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오랜 친구인 유백사 집에 숨게 된다. 그런데 어디선가 '슥삭슥삭' 칼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조는 암살하려는 음모라 판단하여 그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썰어버린다.
피투성이가 된 현장에서 조조는 깨닫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도망자 친구를 위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를 잡으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삼겹살 파티를 피의 살육적으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오해 앞에서 덕이 있는 조조는 어떻게 했을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시체 앞에서 사과라도 했을까? 조조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내뱉는다.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
이건 덕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대사가 아니라 고담시에서 베트맨과 싸우는 조커가 할 법한 대사 아닌가. 넷플릭스의 트루크라임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메인 빌런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교수님의 말에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나는 과거 교수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다음 기수부터 매주 등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이런 제안을 뻔뻔하게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매주 등산할 일이 앞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속뜻은 따로 있었다. 매주 등산하며 교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면, 위와 같은 오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종종 시와 같은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많은 칭구들이 오해한다. 거기서 끝나면 좋은데 완전히 왜곡해서 다른 말을 뱉는다. 이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교수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사무국장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국장님께 교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에 대해 질문 버튼을 꾹 누르면, 마치 동전을 하나 넣었는데 콜라 50캔을 쏟아내는 고장 난 자판기처럼 지식이 우수수수수 쏟아져 내린다. 당시 훈민정음의 원리와 조선시대의 역사를 가만히 듣던 나는.. 얼마나 무지한 사람이었는지 반성하게 될 정도다.
두번째 방법은 교수님이 읽은 책의 저자를 파헤치는 것이다.
교수님의 책 그리고 교수님이 언급하신 책 뿐만 아니라, 언급한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들도 함께 파고들다보면, 조조가 내뱉은 정신분열증 사이코패스 같은 대사가 왜 덕을 갖춘 자의 표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내 갈증과 궁금증을 해결해 준 사람은 루쉰이다. 딴 소리지만 루쉰은 기본학교에서 다소 특별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루쉰(鲁迅)의 한자를 보면 '나라 노(鲁)' 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나라 노(鲁) 씨의 본관은 인천의 강화군과 그리고 전라남도 함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뭐 별거 아니지만, 루쉰은 기본학교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루쉰의 <아Q정전>은 기본학교 필수 교양 도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Q정전>을 읽은 기본학교 칭구들의 90% 정도는 내친김에 루쉰의 다른 저작까지 섬렵했을 것이다. 그러면 조조가 친구의 가족을 성실하게 몰살하고 나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 라는 대사가 어째서 덕을 품은 사람이 뱉을 수 있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물론 모두의 생각이 같진 않겠지. 몇몇은 저 소름돋는 사이코패스 조조 새키를 당장 철창 안으로 넣어야 한다며 거품 물 것이다.
최진석 교수님은 조조를 덕이 있는 사람이라 하셨다. 그런데 루쉰은 이에 한술 더 떠서 조조를 영웅이라 칭송한다. 이는 <루쉰 전집 5 - 이이집/삼한집> (그린비,2014)의 '위진 풍도. 문장과 약.술의 관계' 장에서 읽을 수 있으며, 나의 갈증과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왜 조조의 덕을 설명할 때 황건적 토벌 외에 다른 사례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나의 갈증이었는데, 루쉰은 서두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루쉰은 역사상 기록이나 논단은 때때로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지적한다. 통상적으로 어느 왕조의 역사가 길면 그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지만, 왕조의 연대가 짧으면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이 이전 시대의 인물을 헐뜯게 된다. 조조가 기틀을 다진 위나라 역시 그 연대가 짧았고, 다음 왕조인 사마씨의 진나라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폄하당하는 역사적 통례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로, 최진석 교수님이 조조가 덕이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황건적 이야기 외에 추가로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자명해진다. 조조의 진짜 역량을 입증할, 왜곡되지 않은 역사적 기록 자체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루쉰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후대 역사가들이나 사마씨 일가가 마음대로 지워버렸거나 폄하할 수 없는 증거들을 찾아나섰다. 그것은 조조가 당대 사회에 남긴 문화와 사상적인 발자취다. 이 루쉰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친구의 가족을 몰살하고도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도록 하지 않겠다." 라고 외친 섬뜩한 대사가 역설적이게도 덕을 갖춘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납득하게 된다.
아래는 '위진 풍도. 문장과 약.술의 관계' 장을 짧게 요약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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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나라 말기에는 스스로 청류라 부르던 지식인들, 맑고 고결하다는 명분에 집착하는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들로 드글드글했다. 조조는 이러한 낡은 도덕과 허례허식이 천하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 모순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통탈(通脫, 자유로움)'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불충불효해도 재능만 있으면 기용하겠다." 라는 조조의 선언은 위선적인 사회 시스템을 부수고 인간의 주체성을 해방시킨 결단에 가까웠다.
이러한 조조의 거침없는 기풍은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을 뿐더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쏟아내며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썼다. 루쉰은 조조의 아들인 조비 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 문학이 도덕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고 평가한다.
물론 루쉰은 조조의 싸이코패스 같은 습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공융의 일화로 설명한다. 공융은 조조의 정책마다 사사건건 비꼬며 반대했다. 그 사례로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여인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도 하는데 혼인은 왜 안 막냐" 라며 조롱하는 식이었다. 결국 조조가 공융을 처형하는데, 그가 내세운 죄목은 불효였다. 낡은 도덕을 비웃던 조조가 권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이 타파하려고 한 도덕을 무기로 휘두른 것이다. 루쉰은 이를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조조에게 "왜 처음과 말이 다르냐?" 고 따져 묻는다면, 아마 우리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의 거침없는 통탈의 이면에는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낡은 도덕마저 살인 도구로 부활시키는 절대권력의 냉혹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씨 일가가 권력을 빼앗으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무력과 교묘한 수단으로 왕위를 빼앗아 정통성이 부족한 사마씨는, 자신들의 약점을 덮기 위하여 조조가 무너뜨렸던 도덕인 효를 절대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 부활시키며 사람들을 억압한다. 제도가 개인의 숨통을 조이는 상황 속에서 혜강과 완적 같은 지식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다른 선택을 한다. 완적은 말실수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매일 술에 취해 지냈고, 자신의 글에서도 마음을 꽁꽁 숨겼다.
반면 혜강은 체제의 위선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천하를 차지한 옛 왕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결국 사마씨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사마씨 일가는 과거 조조가 공융을 죽일 때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친구의 불효 사건에 혜강을 억지로 연루시켜 처형한다.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위해 흉기로 사용한 위선의 시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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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내용이다. 무엇보다 루쉰이 이러한 말을 한 이유는 단순하다. 단순 삼국지 덕후여서 조조를 칭송하기 위함이 아니다. 위진 시대의 권력자들이 도덕을 무기화했던 구조적인 폭력을 당시 중국 사회로 빗대어 비판하기 위함인 것이다.
루쉰의 글을 읽고 나면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도록 하지 않겠다." 라는 조조의 싸이코패스 같은 대사는 다르게 다가온다.
이 말은 당시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들이라면, 입 밖으로 절대 꺼낼 수 없다. 하지만 조조는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저버린 현실과 본인의 잔혹함을 위선적인 도덕적 명분으로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과 맞붙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가식적인 도덕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실을 인정하는 태도. 최진석 교수님과 루쉰이 조조에게서 발견한 덕과 영웅성은 이 솔직함과 맞닿아 있다.
물론 루쉰의 글을 읽었음에도 조조가 덕이 있다는 교수님의 주장에 거품 물고 반대할 수 있다. 딴지 좀 걸면 어떤가. 하지만 적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반대하는 것과 맥락도 모르고 반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반대로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히 찬성할 때도 다르지 않다. 제대로 이해하고 무릎을 탁 치는 것과 그저 저명한 학자의 말에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박수 치는 것 역시 하늘과 땅 차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교수님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교수님의 책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진짜 해답은 최진석 교수님이 툭툭 던져놓은 단서, 그분이 읽고 언급한 지식인과 저자들의 머릿속까지 기어 들어가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만 읽는 게 아니라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등을 읽는 것이다. 루쉰의 <아Q정전>만 읽는 게 아니라, 루쉰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조조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인물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져 나온다. 루쉰을 시작으로 알베르 카뮈, 아자 가트, 김형효 등등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최진석, 조조, 루쉰, 알베르 카뮈, 아자 가트, 김형효 등드으이 인물들은 하나의 끈으로 엮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끈이 기본학교 정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치며
이제는 이 끈이 무엇인지 인식한 기본학교 칭구들이 더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모든 기본학교 칭구들을 만난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나거나, 어깨 너머로 보거나, 써놓은 글을 바탕으로 이 끈을 인식한 친구가 누구 누구인지 가늠하고 있다. 살짞 허세를 덧붙여서 말하자면, 1기부터 5기까지 남자 몇 명, 여자 몇 명인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정도로 꽤 있다. 누군가는 정치 성향으로 판단한 것이냐 되물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의 정치 성향을 알 수는 없지만 오른쪽인 분도 있고, 왼쪽인 분도 계신다. 그 분의 박사논문 주제가 유럽연합 관련된 것이어서 통합적 사고에도 능통해 보인다. 그 분과 나는 삶의 태도가 거의 정반대이다. 나는 경박하고 그분은 교양이 넘친다. 그분과 과거 전화로 1시간 넘게 떠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이 끈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분은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릴 도와줄 인적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지 않나. 최진석 교수님도 계시지만, 김문수 교수님도 계신다. 과거 김문수 교수님과 아주 짧게 통화했다가 알고 보니 40분을 훌쩍 넘겼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품고 계셨다. 다시 말해 함평에서의 논의를 확장시키는 데 도와줄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사변적인 논의도 가치가 있겠지만.. 그럼 밀면 먹으러 가야겠다
- 다음글탈 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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