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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61] 철학적인 높이를 갖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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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2회   작성일Date 25-04-29 22:35

    본문

    세계를 그만큼 더 넓고 높은 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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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61
    2024. 7. 1.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철학적 사유'에 관한 것 입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중에서 발췌한 이 글은 '철학적 높이의 시선'에 대한 설명을 수학에 빗대어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으로 이번 한주도 경쾌하게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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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철학적인 높이를 갖는 것이 창의적 삶을 사는
      

     탁월한 시선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익숙하게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인이 하는 것처럼 언어 자체를 들여다보거나 또 시적인 높이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같다.

     

     그것은 차원이 달라지기에 그렇다. 시를 이해하는 사람과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세계를 보는 통찰의 깊이와 높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언어를 지배하는 시인과 언어를 단지 사용할 뿐인 보통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사실상 철학은 아주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타고나지 않는 한, 훈련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본다. 숫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과 다루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난다. 우리 모두 알듯이 ()’라는 것은 원래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를 분류하고 또 분류한 그것들을 다루는 도구로 개발된 하나의 관념적인 장치다. 그런데 인간은 왜 분류를 할까?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재편성, 즉 디자인하기 위해서다. 세계를 분류해서 재편성하고 디자인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의도대로 그것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다.

     

     ‘2’라는 숫자가 있다. ‘2’는 매우 포괄적인 분류의 한 형태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이 ‘2’가 되기도 하고, 중국과 미국이 ‘2’가 되기도 한다. 지구와 달을 ‘2’라 하기도 하고, 이슬 두 방울이 ‘2’가 되기도 한다. 이 생각과 저 생각을 합해서 ‘2’가지 생각, ‘2’라 하기도 한다. 또한 네 사람을 묶는 두 집단을 ‘2’라 하기도 한다. 특별한 의도에 따라 분류된 어떤 특정한 유형을 ‘2’라는 숫자 하나로 모두 표기할 수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한 형태의 ‘2’라는 숫자 하나에 모인다. 포함된다. 압축된다. 추상화된다. 이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특정 경우를 숫자 하나로 지칭하는 일은 매우 경제적이다. 경제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알면,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커진다.

     

     수를 사용하지 못했던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할 때, ‘수의 사용이란 인간이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진보했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원하는 구도, 자기 전략에 맞게 세계를 구분하고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특정한 유형의 구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수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매우 높은 차원에서 추상화된 세계 분류 형태의 한 가지인 를 획득한 다음에는 그것들을 요모조모 재배치하거나 의미를 조정하는 데 사용한다. 서로 특정한 의미 계열 안에서 덧붙여보기도 하고 줄여보기도 한다. 바로 더하기와 빼기를 해보는 것이다. 다음에는 그것을 하나의 틀로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덧셈이고 뺄셈이다.

     

     더하기와 빼기를 발견하고 나서는 또 정해진 한 무더기에서 같은 것을 계속 더하거나 빼내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을 궁리한다. 계속 빼내는 일을 나누기로 도식화하고, 계속 더하는 일을 곱하기로 도식화한다. 곱하기와 나누기가 보여주는 효율성은 실로 엄청나다. 하나하나 계속 더하거나, 하나하나 계속 빼내는 일을 일일이 하지 않고 일정한 틀로 만들어서 단숨에 해치워버린다. 심지어는 인간이 평생 해도 끝낼 수 없는 정도의 지속적인 빼기나 더하기마저도 눈앞에서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정해진 무더기에서 일정한 양을 계속 빼낸다면 몇 번 만에 다할 수 있을까를 예측하는 일은 사실 엄청난 진보다.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지성의 고양이나 전략적 시선으로서의 상승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더 의미를 두고 보아야 할 점은 인간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유형의 반복적인 빼기와 더하기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틀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대수(代數)의 단계로 확장되면 또 차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숫자로 표기된 계산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숫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대신하는 xy 등과 같은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서 계산의 범위와 규칙성을 더욱 다양하고 정교하게 할 수 있다. 방정식의 문제 해결 방법이다.

     

     임의의 상수와 미지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로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학적인 방식이 훨씬 더 넓어지고 형식화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이전에 비해서 더욱 엄밀한 공식화의 절차를 갖게 된다. 연역적인 추론이 훨씬 간편해져 더 큰 효율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략적인 해결 능력의 차원이 한층 높아졌다.

     

     정해진 숫자로만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미지의 기호를 붙여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는 시선의 높이에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이 능력의 차이를 만든다. 따라서 지배력과 관리 능력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기하는 또 더 높은 단계다. 더 추상화되기 때문이다. 공간을 수리적으로 관리하려고 고안된 것이 기하학이다. 기하학은 기본적으로 공간과 관계된다. 공간을 추상화해서 수리적으로 표현하는 기하학은 사실 이집트인들이 개발했는데, 정작 기하학의 발전은 그리스인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사고가 경험적이었다. 그래서 기하학을 개발해놓고도 그것을 피라미드를 쌓거나 토지를 측량하는 구체적인 활동에만 사용하였다.

     

     이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추상적인 사유에 능했다. 그래서 도형에 대한 개념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완전히 새롭게 형성하고 근본적인 원리를 건설하여 거기서부터 연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직각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는 나머지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 두 개의 넓이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수에서 방정식이 고안되듯이, 이런 도형에 대한 이해도 일반화 차원에서 공식으로 만들어진다. 원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하학의 발전으로 세계를 관리하는 시선의 높이가 크게 상승했다.

     

     경험적인 연산이나 대수의 차원(물론 지금의 대수학은 이미 고도로 추상화되었지만)과 기학의 차원은 높이에서 차이가 난다. 기하학까지 발전시킨 사회나 문화권은 그렇지 못한 곳에 비해 전략적인 구사 능력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지성의 높이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수학은 지성을 고도로 발휘해 수나 도형이나 대수를 가지고 세계와 관계하지만, 철학은 도형대신 개념관념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한다. 우리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 현실적인 지배력까지 보장해주는 이유는 세계를 그만큼 더 넓고 높은 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의 높이를 철학의 단계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7]2018, 93-97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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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말새몸짓의 소식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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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9일 토요일, <2024 새말새몸짓 최진석의 철학강좌> 2기의 수업이 전남 함평 유림회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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