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패배하지 않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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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일의 기다림 >
여기, 한 노인이 있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어부다. 그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실력이 없어서 일까? 노인은 노련한 어부다. 세월만큼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조류와 하늘의 움직임을 알며 물고기들의 특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또한, 배짱이 있고 어떤 어부보다도 낚싯줄을 원하는 수심에 정확히 드리우는 요령이 있다. 한때는 삼 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큰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지금은 비롯 다른 배를 타고 있지만, 그의 실력을 믿고 따르며 조수 역할을 했던 소년도 있었다. 이처럼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가진 어부가, 단순히 지독한 불운으로 84일 동안 허탕을 친 것일까? 노인은 84일 동안 바다에서 숱한 물고기를 만났을 것이다. 그중 자신이 노리는 최고의 물고기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실제 그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생활이 넉넉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허름한 집에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어떠한 궁핍과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어부로써 온갖 풍파를 해쳐오며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노인에게, 이제 사소한 일상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저 죽기 전까지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야구선수처럼, 인생 최고의 물고기를 잡고 싶은 열망이 그를 살아있게 했다. 이러한 내면의 모습처럼 노인은 깡마르고 여윈 데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노쇠했으나,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사람들은 그를 운이 없는 어부라며 비아냥거렸지만, 노인은 자신만의 욕망에 또렷이 집중하고 있기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최고의 물고기를 잡는 최후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낚시꾼이다. 84일이라는 허탕의 시간들은 실패가 아닌 기다림의 나날이었다. 오랜 기다림은 그를 희망과 자신감이라는 열망으로 채웠고, 그러한 열망은 노인을 절대 고독과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먼바다로 이끌었다.
< 집념의 투쟁 >
먼바다로 떠난 85일째 날, 드디어 노인의 낚싯바늘에 예사롭지 않은 크기의 녀석이 걸려들었다. 그는 낚싯줄로 전해오는 물고기의 거대함 느낀 후 무게와 힘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채고 버티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버티기는 사흘 밤낮으로 이어지며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가 된다. 거대한 물고기의 힘은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물고기가 날뛰지 않고 서서히 힘이 빠지도록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낚싯줄을 조율할 뿐이다. 그러다 물고기가 세차게 움직이거나 뛰어오를 때면,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한 손은 쥐가 나 오그라들었고, 한 손은 낚싯줄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나뒹굴어 상처 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버티고 있었다. 끼니는 날생선 한두 마리가 전부였다. 노인은 망망대해 한가운데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는 목표한 것을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수행해내는 그러한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기력이 쇠한 노인이며 나약한 한 인간이었다. 외로운 사투 속에서 과거 조수 역할을 맡았던 소년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노인은 나약한 자신을 책망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투에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필수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인내와 끈기 그리고 몰입이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려든 순간부터 노인은 녀석과 한 몸이 됐다. 그는 낚싯줄을 몸에 감아 거대한 무게를 지탱한 채, 물고기를 적당한 수심에 머물게 하기 위해 점점 몰입했다. 노인의 의식은 녀석의 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존재의 모든 것에 가닿았다. 크고 멋진 자태의 자연물에 경외심을 느꼈고 죽음을 앞둔 녀석을 애민(愛憫) 하였다. 거대한 녀석과의 사투에 육체와 더불어 정신까지 완전히 몰입된 혼연일체의 상태가 된 것이다. 몰입은 집념을 일으키고 집념은 자신을 잊게 했다. 하여, 몰입할수록 강해지는 집념은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이 사투는 물고기가 아닌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뼈를 파고드는 고통. 극한에 홀로 남겨진 고독. 고갈된 체력과 굶주림. 사흘을 지새워 혼미해진 정신에도 노인은 낚싯줄을 놓지 않았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처절한 투쟁에서 초인적인 집념으로 자신을 이겨냈다. 마침내 물고기는 기진맥진하여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는 혼신의 힘으로 거대한 청새치에 일격을 가했다. 노인의 역사상 최고의 물고기를 잡은 것이다.
< 결코 패배하지 않는 인간 >
사투에서 승리한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조각배에 묶고 귀환한다. 그러나 환희로 가득한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 절망으로 스며든다. 청새치에게서 분출되는 피가, 상어 떼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또다시 상어 떼와 초인적인 사투를 벌인다. 소중한 전리품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쏟아 상어들을 때려잡았다. 덤벼드는 놈들을 모조리 응징했지만, 항구에 도착했을 때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육지로 돌아온 노인은 탈진했다. 소년은 그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지난 사흘간의 일을 짐작했다. 처절한 사투에 자신이 함께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노인은 최고의 물고기를 잡았으나, 상어들에게 도둑맞아버린 지독한 불행을 푸념했다. 하지만, 소년에게 희망을 북돋우는 몇 마디의 말을 들으며 어느덧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그러고는 곧 평소와 같이 늘 같은 꿈을 꾸며 잠들었다.
누군가 운명의 소용돌이에 맞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모든 것을 잃는 결과를 맞이하면 어떻게 될까? 사투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자신을 향한 자책 또는 상대를 향한 원망으로 심연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악몽으로 내재된 사건의 기억이 삶을 잠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이 사투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곧 평소와 똑같은 꿈을 꾸며 잠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평정심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했을까?
상어에게 뜯긴 청새치를 보며 노인은 허망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내 무너지려는 자신을 부여잡고 말한다. "인간은 패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투쟁의 패배자는 상대를 향한 원망과 자책으로 패배감이라는 자의식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경우에 따라 강한 정신력으로 패배를 반전의 계기로 만들기도 하지만, 패배감에 휩싸여 자멸과 경멸, 소멸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노인은 상어 떼에 뜯긴 청새치를 보며 패배의 자의식에 휩싸이지 않는다. 마주한 운명과의 투쟁 속에 오직 파멸당하거나 파멸시킬 뿐. 패배의 감정적 잉여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원한과 분노는 사건의 종결과 함께 완전히 연소된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를 끌고 항구에 다달을 무렵 노인은 생각했다.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무리하게 먼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욕심.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청새치에 대한 원망. 값진 전리품을 훔쳐간 상어 떼를 향한 분노. 하지만 노인은 그 어떤 불필요한 자의식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저 사건의 인과를 명료하게 정리할 뿐이다. 자책과 원망, 분노의 자의식을 투영하지 않음으로써 사건의 실상을 응시하고 평정을 유지했다. 이것이 그가 곧바로 일상을 되찾고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던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수많은 도전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수많은 도전 속에 승리만을 쟁취할 수 없다. 그렇다. 삶은 도전에 따른 실패의 연속이다. 그리고 실패를 패배의 악몽으로 연결하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의식이다. 수많은 패배의 자의식은 마음 곳곳에 깊숙이 박혀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와 마주한다면, 몰입과 집념으로 혼신을 다해 맞선다. 설사 실패를 맛보게 될지라도 인과와 실상을 명료하게 응시하여 패배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것이 산티아고가 우리에게 보여준 결코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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