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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단법인 새말새몸짓 &amp;gt; 커뮤니티 &amp;gt; 자유게시판</title>
<link>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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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종이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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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작년 봄에 썼던 글을 다시 끌어올려 남겨봅니다.<br/>저는 최진석 교장선생님께 배웠습니다.<br/>시는 쓰는게 아니고 튀어나오는 거라고.<br/>제 안에서 튀어 나왔던 시입니다.<br/>종이꽃.<br/><br/><A HREF="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2467&sfl=wr_name%2C1&stx=%EA%B9%80%EA%B4%91%EB%AF%BC&sop=and" TARGET="_blank"  rel="nofollow">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2467&sfl=wr_name%2C1&stx=%EA%B9%80%EA%B4%91%EB%AF%BC&sop=and</A>]]></description>
<dc:creator>김광민</dc:creator>
<dc:date>Sat, 06 Jun 2026 04:26:4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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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살인마 조조는 덕이 있는 인물일까!?!?</title>
<link>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link>
<description><![CDATA[<p>최진석 교수님은 덕이 있는 사람을 예로 들 때 삼국지의 조조를 자주 말씀하신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갈증 그리고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p><p><br /></p><p>갈증은 다음과 같다. 황건적 이야기 외에 조조의 어느 구석이 덕을 갖춘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p><p><br /></p><p>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의 가족을 말살한 조조를 덕이라고 볼 수 있나? </p><p><br /></p><p><br /></p><p>궁금증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p><p><br /></p><p>조조는 동탁의 뒤통수를 치려다 실패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오랜 친구인 유백사 집에 숨게 된다. 그런데 어디선가 '슥삭슥삭' 칼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조는 암살하려는 음모라 판단하여 그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썰어버린다. </p><p><br /></p><p>피투성이가 된 현장에서 조조는 깨닫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도망자 친구를 위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를 잡으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삼겹살 파티를 피의 살육적으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오해 앞에서 덕이 있는 조조는 어떻게 했을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시체 앞에서 사과라도 했을까? 조조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내뱉는다.</p><p><br /></p><p>"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p><p><br /></p><p>이건 덕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대사가 아니라 고담시에서 베트맨과 싸우는 조커가 할 법한 대사 아닌가. 넷플릭스의 트루크라임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메인 빌런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p><p><br /></p><p><br /></p><p>사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교수님의 말에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나는 과거 교수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p><p><br /></p><p>"다음 기수부터 매주 등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p><p><br /></p><p>물론 내가 이런 제안을 뻔뻔하게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매주 등산할 일이 앞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속뜻은 따로 있었다. 매주 등산하며 교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면, 위와 같은 오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p><p><br /></p><p>교수님은 종종 시와 같은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많은 칭구들이 오해한다. 거기서 끝나면 좋은데 완전히 왜곡해서 다른 말을 뱉는다. 이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교수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p><p><br /></p><p>첫번째는 사무국장님을 찾아가는 것이다.</p><p>사실 이 방법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국장님께 교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에 대해 질문 버튼을 꾹 누르면, 마치 동전을 하나 넣었는데 콜라 50캔을 쏟아내는 고장 난 자판기처럼 지식이 우수수수수 쏟아져 내린다. 당시 훈민정음의 원리와 조선시대의 역사를 가만히 듣던 나는.. 얼마나 무지한 사람이었는지 반성하게 될 정도다. </p><p><br /></p><p>두번째 방법은 교수님이 읽은 책의 저자를 파헤치는 것이다.</p><p>교수님의 책 그리고 교수님이 언급하신 책 뿐만 아니라, 언급한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들도 함께 파고들다보면, 조조가 내뱉은 정신분열증 사이코패스 같은 대사가 왜 덕을 갖춘 자의 표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p><p><br /></p><p>내 갈증과 궁금증을 해결해 준 사람은 루쉰이다. 딴 소리지만 루쉰은 기본학교에서 다소 특별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루쉰(鲁迅)의 한자를 보면 '나라 노(鲁)' 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나라 노(鲁) 씨의 본관은 인천의 강화군과 그리고 전라남도 함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뭐 별거 아니지만, 루쉰은 기본학교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p><p><br /></p><p>다시 돌아와서, 루쉰의 &lt;아Q정전&gt;은 기본학교 필수 교양 도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lt;아Q정전&gt;을 읽은 기본학교 칭구들의 90% 정도는 내친김에 루쉰의 다른 저작까지 섬렵했을 것이다. 그러면 조조가 친구의 가족을 성실하게 몰살하고 나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 라는 대사가 어째서 덕을 품은 사람이 뱉을 수 있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물론 모두의 생각이 같진 않겠지. 몇몇은 저 소름돋는 사이코패스 조조 새키를 당장 철창 안으로 넣어야 한다며 거품 물 것이다.</p><p><br /></p><p>최진석 교수님은 조조를 덕이 있는 사람이라 하셨다. 그런데 루쉰은 이에 한술 더 떠서 조조를 영웅이라 칭송한다. 이는 &lt;루쉰 전집 5 - 이이집/삼한집&gt; (그린비,2014)의 '위진 풍도. 문장과 약.술의 관계' 장에서 읽을 수 있으며, 나의 갈증과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주었다.</p><p><br /></p><p>"왜 조조의 덕을 설명할 때 황건적 토벌 외에 다른 사례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p><p>이것이 나의 갈증이었는데, 루쉰은 서두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루쉰은 역사상 기록이나 논단은 때때로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지적한다. 통상적으로 어느 왕조의 역사가 길면 그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지만, 왕조의 연대가 짧으면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이 이전 시대의 인물을 헐뜯게 된다. 조조가 기틀을 다진 위나라 역시 그 연대가 짧았고, 다음 왕조인 사마씨의 진나라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폄하당하는 역사적 통례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p><p><br /></p><p>고로, 최진석 교수님이 조조가 덕이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황건적 이야기 외에 추가로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자명해진다. 조조의 진짜 역량을 입증할, 왜곡되지 않은 역사적 기록 자체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p><p><br /></p><p>루쉰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후대 역사가들이나 사마씨 일가가 마음대로 지워버렸거나 폄하할 수 없는 증거들을 찾아나섰다. 그것은 조조가 당대 사회에 남긴 문화와 사상적인 발자취다. 이 루쉰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친구의 가족을 몰살하고도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도록 하지 않겠다." 라고 외친 섬뜩한 대사가 역설적이게도 덕을 갖춘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납득하게 된다. </p><p><br /></p><p><br /></p><p>아래는 '위진 풍도. 문장과 약.술의 관계' 장을 짧게 요약한 내용이다.</p><p><br /></p><p>*</p><p><br /></p><p>당시 한나라 말기에는 스스로 청류라 부르던 지식인들, 맑고 고결하다는 명분에 집착하는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들로 드글드글했다. 조조는 이러한 낡은 도덕과 허례허식이 천하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 모순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통탈(通脫, 자유로움)'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불충불효해도 재능만 있으면 기용하겠다." 라는 조조의 선언은 위선적인 사회 시스템을 부수고 인간의 주체성을 해방시킨 결단에 가까웠다. </p><p><br /></p><p>이러한 조조의 거침없는 기풍은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을 뿐더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쏟아내며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썼다. 루쉰은 조조의 아들인 조비 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 문학이 도덕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고 평가한다. </p><p><br /></p><p>물론 루쉰은 조조의 싸이코패스 같은 습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공융의 일화로 설명한다. 공융은 조조의 정책마다 사사건건 비꼬며 반대했다. 그 사례로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여인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도 하는데 혼인은 왜 안 막냐" 라며 조롱하는 식이었다. 결국 조조가 공융을 처형하는데, 그가 내세운 죄목은 불효였다. 낡은 도덕을 비웃던 조조가 권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이 타파하려고 한 도덕을 무기로 휘두른 것이다. 루쉰은 이를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조조에게 "왜 처음과 말이 다르냐?" 고 따져 묻는다면, 아마 우리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의 거침없는 통탈의 이면에는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낡은 도덕마저 살인 도구로 부활시키는 절대권력의 냉혹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p><p><br /></p><p>그런데 사마씨 일가가 권력을 빼앗으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무력과 교묘한 수단으로 왕위를 빼앗아 정통성이 부족한 사마씨는, 자신들의 약점을 덮기 위하여 조조가 무너뜨렸던 도덕인 효를 절대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 부활시키며 사람들을 억압한다. 제도가 개인의 숨통을 조이는 상황 속에서 혜강과 완적 같은 지식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다른 선택을 한다. 완적은 말실수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매일 술에 취해 지냈고, 자신의 글에서도 마음을 꽁꽁 숨겼다.</p><p><br /></p><p>반면 혜강은 체제의 위선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천하를 차지한 옛 왕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결국 사마씨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사마씨 일가는 과거 조조가 공융을 죽일 때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친구의 불효 사건에 혜강을 억지로 연루시켜 처형한다.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위해 흉기로 사용한 위선의 시대였던 것이다. </p><p><br /></p><p>*</p><p><br /></p><p>대략 이런 내용이다. 무엇보다 루쉰이 이러한 말을 한 이유는 단순하다. 단순 삼국지 덕후여서 조조를 칭송하기 위함이 아니다. 위진 시대의 권력자들이 도덕을 무기화했던 구조적인 폭력을 당시 중국 사회로 빗대어 비판하기 위함인 것이다. </p><p><br /></p><p>루쉰의 글을 읽고 나면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도록 하지 않겠다." 라는 조조의 싸이코패스 같은 대사는 다르게 다가온다. </p><p><br /></p><p>이 말은 당시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들이라면, 입 밖으로 절대 꺼낼 수 없다. 하지만 조조는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저버린 현실과 본인의 잔혹함을 위선적인 도덕적 명분으로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과 맞붙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p><p><br /></p><p>가식적인 도덕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실을 인정하는 태도. 최진석 교수님과 루쉰이 조조에게서 발견한 덕과 영웅성은 이 솔직함과 맞닿아 있다. </p><p><br /></p><p>물론 루쉰의 글을 읽었음에도 조조가 덕이 있다는 교수님의 주장에 거품 물고 반대할 수 있다. 딴지 좀 걸면 어떤가. 하지만 적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반대하는 것과 맥락도 모르고 반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반대로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히 찬성할 때도 다르지 않다. 제대로 이해하고 무릎을 탁 치는 것과 그저 저명한 학자의 말에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박수 치는 것 역시 하늘과 땅 차이다. </p><p><br /></p><p>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교수님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교수님의 책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진짜 해답은 최진석 교수님이 툭툭 던져놓은 단서, 그분이 읽고 언급한 지식인과 저자들의 머릿속까지 기어 들어가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lt;데미안&gt;만 읽는 게 아니라 &lt;싯다르타&gt;, &lt;수레바퀴 아래서&gt;, &lt;나르치스와 골드문트&gt; 등등을 읽는 것이다. 루쉰의 &lt;아Q정전&gt;만 읽는 게 아니라, 루쉰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p><p><br /></p><p>위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조조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인물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져 나온다. 루쉰을 시작으로 알베르 카뮈, 아자 가트, 김형효 등등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최진석, 조조, 루쉰, 알베르 카뮈, 아자 가트, 김형효 등드으이 인물들은 하나의 끈으로 엮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끈이 기본학교 정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p><p><br /></p><p><br /></p><p>마치며</p><p><br /></p><p>이제는 이 끈이 무엇인지 인식한 기본학교 칭구들이 더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모든 기본학교 칭구들을 만난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나거나, 어깨 너머로 보거나, 써놓은 글을 바탕으로 이 끈을 인식한 친구가 누구 누구인지 가늠하고 있다. 살짞 허세를 덧붙여서 말하자면, 1기부터 5기까지 남자 몇 명, 여자 몇 명인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정도로 꽤 있다. 누군가는 정치 성향으로 판단한 것이냐 되물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의 정치 성향을 알 수는 없지만 오른쪽인 분도 있고, 왼쪽인 분도 계신다. 그 분의 박사논문 주제가 유럽연합 관련된 것이어서 통합적 사고에도 능통해 보인다. 그 분과 나는 삶의 태도가 거의 정반대이다. 나는 경박하고 그분은 교양이 넘친다. 그분과 과거 전화로 1시간 넘게 떠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이 끈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분은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p><p><br /></p><p><br /></p><p>생각해보면 우릴 도와줄 인적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지 않나. 최진석 교수님도 계시지만, 김문수 교수님도 계신다. 과거 김문수 교수님과 아주 짧게 통화했다가 알고 보니 40분을 훌쩍 넘겼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품고 계셨다. 다시 말해 함평에서의 논의를 확장시키는 데 도와줄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p><p><br /></p><p><br /></p><p>물론 사변적인 논의도 가치가 있겠지만.. 그럼 밀면 먹으러 가야겠다</p>]]></description>
<dc:creator>서우</dc:creator>
<dc:date>Sun, 31 May 2026 15:28:2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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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탈</title>
<link>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link>
<description><![CDATA[<p>샤샤삭</p><p>쥐도 새도 모르게 숨는다</p><p><br /></p><p>뭣 때문에 숨는거야?</p><p>나도 잘 모르겠어</p><p><br /></p><p>그저 두려울 뿐이야</p><p>이 아늑한 곳이 좋아</p><p><br /></p><p><br /></p><p>넌 누구니?</p><p>모습을 보여줘</p><p><br /></p><p>아늑한 곳에서</p><p>슬금슬금 어흥! </p><p><br /></p><p>토끼가</p><p>호랑이 탈을 썼구나</p><p><br /></p><p><br /></p><p><img src="https://nwna.or.kr/data/editor/2605/59d67979f86099009eadc216571c24ff_1780134940_7657.jpg" title="59d67979f86099009eadc216571c24ff_1780134940_7657.jpg" alt="59d67979f86099009eadc216571c24ff_1780134940_7657.jpg" /><br style="clear:both;" />Kahlo, F. (1938). Girl with death mask (She plays alone) [Painting]. Denver Art Museum, Denver, CO, United States.</p>]]></description>
<dc:creator>한상도</dc:creator>
<dc:date>Sat, 30 May 2026 18:55: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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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 시인은 재미가 없다!!</title>
<link>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link>
<description><![CDATA[<p><br /></p><p>내가 지적으로 덜 성숙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시인들은 하품을 부른다. 물론 짜릿하고 재미있는 한국 시인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마치 광활한 은하계 어딘가에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p><p><br /></p><p>재미는 없지만 나를 위로해준 한국 시인은 있다. 유치환이다. </p><p><br /></p><p>수많은 시집 중 유치환의 시집을 덥석 집어 든 이유는 단순하다. 최진석 교수님이 어느 방송에서 &lt;생명의 서&gt;를 낭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냉장고를 향해 속절없이 끌려가는 싸구려 기념품 자석처럼 유치환의 &lt;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gt;를 읽게 되었다. </p><p><br /></p><p>이 시집이 안겨준 위로는 단순하다. 나는 긴 시간 동안 전 여자친구들을 향한 깊은 죄의식과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 연애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치환의 시를 읽어보니, 연애 스타일이 나와 상당히 유사해 보였다. '나만 븅신인 줄 알았는데, 설마.. 유치환 씨도..?' 같은 생각이랄까. 마치 낯선 땅에서 대한민국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p><p><br /></p><p>그런 느낌을 안겨준 시는 '모란꽃 이우는 날', '치자꽃', '행복', 산 1' 등등이다. 이 시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연애를 했을지 그려진다. 장담컨데, 여자친구를 마음 속의 환영이나 특정 이미지로 박제 해놓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감정을 소비했을 것이다. </p><p><br /></p><p>유치환의 '행복' 이라는 시에서 이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구절은 쌍방향 소통은 관심 밖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체국 창문 앞에서 편지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사랑의 완성이자 목적이다. 상대가 편지를 읽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내 사랑에 응답할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그저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며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하여 홀로 카타르시스를 누릴 뿐이다. </p><p><br /></p><p>이 고립되어 있는 듯한 감정은 '산 1'에서 날 것으로 드러난다. 화자는 대지에 엎드린 산을 향해 "묵연히 명목하고 자위하는 너" 라고 부르며 자신과 동일시 한다. 외부 세계를 외면한 상태로 누구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은 채, 스스로 고독을 탐닉하는 것이다. </p><p><br /></p><p>앞에서 언급한 유치환의 시를 들여다 보면, 살아 움직이는 타자가 없다. 다시 말해, 그의 연애 스타일은 상대를 특정 이미지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로 닫힌 방안에서 홀로 감정을 불태우는 것에 가깝다. 과거에 내가 했던 연애 방식과 매우 비슷하게 느껴진 이유다.</p><p><br /></p><p>나는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바보다. (아, 생각해보니 연애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다방면으로 바보 같긴 했다.) 약간 미화하자면 순수했다. 학창 시절 여사친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나는 눈치를 국에 말아먹은 얼굴로 외쳤다. </p><p><br /></p><p>"둘이서만 놀면 재미없잖아? 내가 친구들 모아볼게!"</p><p> </p><p>미스터리한 점은 나처럼 매력 없는 사람에게 목을 매는 여성이 꽤나 존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 여자친구 중 한 명은 나 때문에 정신과 상담까지 받으러 갔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일화를 늘어놓으면, 누군가는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을 일삼는 악랄한 갱스터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든 나는 나름 순수한 인간이었다. 내 문제는 연락 두절이었다. 그래서 전 여자친구들은 매번 붉어진 눈시울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p><p><br /></p><p>"나정도면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데, 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p><p><br /></p><p>당시의 나는 말할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바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그녀에겐 결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다만 고백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p><p><br /></p><p>당시 나는 여자친구에게 연락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언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힌 탓에, 최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머릿 속에 쑤셔 넣어야만 했다. 활자를 읽지 않으면 초조해서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15분 간격으로 미친 듯이 번갈아 읽었다. 책 뿐만 아니라, 주간지, 월간지, 학술지까지도 모조리 뜯어 먹었다. 그렇게 수집한 문장, 이야기, 지식들을 활용하여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나만의 철학과 생각을 레고 블록처럼 조립하기 바빴다. </p><p><br /></p><p>그런데 이러한 대공사 끝에는 당혹스러운 부산물이 뒤따랐다. 바로 조립하고 남은 지식 찌꺼기들이었다. 책을 읽다가 묘하게 꽂혀서 메모장 한구석에 적어두긴 했는데, 도무지 내 끼워넣을 데가 없어 버려진 파편들. </p><p><br /></p><p>나는 이 파편들을, 억울하게 방치된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평소 생사 확인조차 안 했고, 아무리 짧아도 2주에 한 번 꼴로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만날 대마다 백과사전 두께에 달하는 묵직한 편지를 쥐어주곤 했다. 물론 그 편지에는 로맨틱함이나 애틋한 따위는 없었다. </p><p><br /></p><p>편지 내용은 유치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 눈에 밟힌 그녀의 낡은 신발을 주제로 나불거리는 내용이다. 그녀의 키가 167cm라는 사실, 유난히 작은 손, 꽤 길쭉한 체형이라는 특성, 무릎부터 복숭아뼈까지의 길이를 통해, 발 사이즈를 도출한 뒤, 어떤 신발을 사주고 싶은지 생각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사과로 끝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연락을 보지 않아 미안해. 그런데 어쩌겠어. 네 생각을 하는 게 그만큼 재미있는데.".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그녀의 낡아빠진 신발은 원래부터 꼬질꼬질한 빈티지 콘셉트로 디자인 된 명품 운동화였다. </p><p><br /></p><p>여자친구와 살을 맞대는 역동적이고 끈적한 관계를 즐기는 게 아니라, 상대를 내 머릿속 액자에 가둬놓고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지켜보기만 하는 연애 방식. 유치환의 시를 읽으며 나 같은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의 시인이 한 명 더 있다. 윤동주다. 물론 윤동주는 나와 유치환의 연애 스타일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들여다 본다' 같은 구절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부분에서 살을 맞대고 역동적인 관계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걸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헤르멘 하세는 키스 중독자였겠지. 조금 딴 소리지만, 이 지점에서 유치환과 윤동주 중 기본학교 에세이를 누가 더 잘 쓸 것 같냐명, 당연 유치환이다. 유치환이 윤동주보다 더 솔직하거든. </p><p><br /></p><p>최진석 교수님은 시를 읽으면 생각이 확장된다고 하셨다. 물론 생각이 확장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가 없다. 생각을 확장시켜주면서 재미있게 써놓은 시인들은 대체로 서양 사람들이다. </p><p><br /></p><p>유치환은 재미없는 시인이지만 나를 위로해준 좋은 시인이지.</p><p><br /></p><p>어쩌면 한국 시인이 재미 없는 이유는 내가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탓이겠지. </p><p>최진석 교수님처럼 한자 많이 알면 한국 시가 더 재미있어지려나? </p><p>그런데 한자 공부하는 게 더 재미 없을 거 같다.</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진서영</dc:creator>
<dc:date>Fri, 29 May 2026 21:08: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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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본학교에서 느낀 무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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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p>오늘은 새말새몸짓 강의가 있는 날이다. 분명히 월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나 잠잠하다. 혹시나 해서 함평에 거대 정전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뉴스를 찾아볼 정도였다. 곰곰이 따져보니,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고로, 교수님은 강의 대신 부처님을 만나러 가신 모양이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삼성전자의 이재용이 우리 집에 오신 날이라면 그정도 약속은 바로 취소할 수 있으니까.</p><p><br /></p><p>그렇게 나는 텅 빈 시간 동안 기본학교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무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거든. </p><p><br /></p><p>내가 바라본 기본학교의 풍경은 무위라는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는 기본학교의 교장선생님인 최진석 교수님이 지향하고 원하시는 배움의 분위기였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라는 동물은 같은 공기, 음식을 먹어도 각자 다른 걸 뱉지 않던가. 그러니 이 무위라는 흐름과 정확히 정반대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p><p><br /></p><p>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을 붙이자면 청강생 이슈다.</p><p><br /></p><p>우리 기수 중 한 명이 3차 면접에서 탈락한 자신의 배우자를 데려왔는데,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특유의 너그러움으로 그분을 청강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그러자 몇몇은 마치, 자기 도시락에서 제일 좋은 반찬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으로 반발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자신은 1차 에세이, 2차 에세이, 3차 면접을 뚫고 들어왔는데, 저 사람은 배우자라는 이유 하나로 기본학교의 입장권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p><p><br /></p><p>내 생각은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1차, 2차 에세이와 3차 면접의 결과만 놓고 보면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차이라고 해봐야 한 끗, 정밀하게 측정하자면 0.02 끗 차이 정도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매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 청강생이라는 존재가 한 명 늘어났다는 건, 나에겐 부당한 특혜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생각을 공유해줄 머리 하나가 추가된 것이었다. </p><p><br /></p><p>무엇보다 기본학교의 룰을 정하는 주체는 결국 최진석 교수님이다. 그분이 청강생을 허락하셨다면, 우리 기수에게 만큼은 새로운 룰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룰을 충실히 따르는 의미에서 청강생을 우리 기수의 일원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햇다. 물을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교수님이 보여주신 무위의 자세를 우리도 고스란히 본받으면서 경험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p><p><br /></p><p>물론 내 주장에 대한 몇몇의 반응은 냉랭했다. 누군가는 나를 현실감각이라고는 1도 없는 이상주의자로 보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체제 앞에 넙죽 엎드리는 전체주의자처럼 보았다. 단언컨데, 한 인간이 어느 한 순간에 이상주의자와 전체주의자로 동시에 보여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은 둘 중 하나 하기에도 빠듯한데, 나는 그 날 그걸 동시에 해냈다. 물론 박수는 받지 못했지.</p><p><br /></p><p>물론 나는 그 시선들에 크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소 건방지고 오만한 마음이지만, 내 눈에 그들은 기본학교가 어떤 공기로 채워져 있는지, 권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들여다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옹졸한 우월감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손바닥 위에서 조그맣게 굴릴 뿐이었다.</p><p><br /></p><p>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우월감을 주머니에 다시 넣어야 했다. 나의 주장은 힘을 잃었고, 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권리에 대해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p><p><br /></p><p>권리라고 하면, 당연히 누려야 할 무언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권리(權利)의 한자만 보면 이익을 꾀한다고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하는 권리는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주장하는 이기적인 태도로 여긴다. 주로 갑질이 일상인 사람들이 뱉는 논리다. "내가 손님인데! 이게 내 권리야!" 같은 식이다. 하지만 이는 권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권리라는 말은 '도리에 맞다'인 영단어 right를 번역하면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right를 권리로 번역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다. 기본학교 칭구들이라면 요시다 쇼인, 후쿠자와 유키치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과거 일본 만 엔권 지폐의 주인공. &lt;학문의 권장&gt;의 저자. 그 후쿠자와 유키치가 맞다. </p><p><br /></p><p>후쿠자와 유키치가 번역한 권리는 '도리를 꾀함으로 다져진다.'에 가깝다. 다시 말해, 법률이 정해지면 그 룰을 따랐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 행동이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행동이 허용된다.'라는 말은 곧 자유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권리는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는 왜 이런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리로 인권, 자연권 등등이 있겠다. 두 번째는 이미 만들어진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다. </p><p><br /></p><p>두 번째 권리에 대해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내 자동차가 초록불에 교차로로 진입하는 건, 룰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차로를 안전하게 지나권 권리인 자유를 얻게 된다. 만약 다른 차가 끼어들어 내 차를 박았다면, 나는 그 규칙을 근거로 내 권리를 방어할 수 있다. 고로, 두 번째 권리는 단순 right가 아니라 주장권이나 청구권 정도로 볼 수 있겠다. </p><p><br /></p><p>문제는 몇몇 사람들이 이 권리를 무한한 인권처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성설설에 입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이므로 개인의 욕망 또한 마땅히 옳은 것이라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지배하는 진상들이 내세우는 논리와 유사하다. 자신은 선하고 옳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욕망에 의거한 요구사항 또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자유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p><p><br /></p><p>여기서 에드먼드 버크가 바라보는 권리는 다르다. 이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국민의 역사와 습속 내에서 묻어나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권리는 주관적인 욕망의 무한한 표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규칙들을 근거로 하여 하나하나 확인될 때에야 국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일정 범위 내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p><p><br /></p><p>나에게 이 논리는 무위를 현대적으로 그려낸 영국의 불문헌법 체계로 보여진다. 성문화된 헌법전이 한 권도 없음에도, 오랜 관습과 판례의 누적만으로 묵직하게 굴러가는 체계. 명문 조항으로 국민을 윽박지르지 않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사회. 이것이 어쩌면 무위의 한 형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영국인들이 지적으로 게을러서 헌법전을 만들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이에 반박할 정도로 지식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은 없다. 다만 그 게으른 세상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고, 세계 대전에서 모두 승리한  국가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p><p><br /></p><p>그렇게 내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최진석 교수님에 의하여 우리 기수에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다면, 우리는 먼저 그 룰을 충실히 따라야 하고, 그 위에 더 나은 습속을 갖추여 애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무언가를 정당하게 주장할 권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p><p><br /></p><p>여기서 내 주장이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p><p><br /></p><p>기본학교의 기본적인 규칙은 세 가지다. 수업을 듣고, 에세이를 쓰고, 산을 오르는 것. 그리고 권리란 정해진 룰을 온전히 따랐을 때에야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그 청강생은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을 것이고 에세이도 부지런히 썼을지 모른다. 하지만 산은 오르지 않았다. 룰을 모두 이행하지 못한 셈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룰을 완수하지 못했고, 그 룰을 이행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그 분을 우리 기수와 똒같은 권리를 지닌 일원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다. </p><p><br /></p><p>물론 산에 오르지 않은 청강생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마음은 없다. 청강생의 입학 자체는 기본학교의 대장인 최진석 교수님이 우리 기수에 정한 하나의 룰이므로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는 단 한 점의 변함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룰을 절반만 이행한 분을 우리 기수와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주장만큼은 미련 없이 거둘 수밖에 없었다. 권리라는 건, 선한 의도나 딱한 개인 사정만으로 슬그머니 쥐여주는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시된 규칙을 끝까지 완수했거나, 적어도 완수하려 노력해본 자만이 비로소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무엇이다.</p><p><br /></p><p>기본학교에서 내가 어떨결에 들이마셨던 무위라는 공기는 그런 것이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무질서가 아니고, 사람을 옥죄는 억압적인 통제도 아니다. 강요 없이 최소한의 룰을 지키며 건강한 습속을 쌓아나갈 때, 그제야 진짜 권리가 슬그머니 피어나는 것이다. 무위라는 건 텅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단단한 무엇이다. </p><p><br /></p><p>아 그것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8시에 한 번, 9시에 한 번, 10시에 한 번 유튜브에 들어가 새로고침을 했다. 세 번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했다.</p><p><br /></p><p>교수님은 진짜로 부처님을 만나러 가신 게 분명하다. 그럼 나는 꿈나라에서 로또 1등 당첨 번호 좀 만나러 가야겠다.</p>]]></description>
<dc:creator>서우</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23:48: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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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준비</title>
<link>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link>
<description><![CDATA[<p>신선한 식재료들을 한아름 사왔다.</p><p>한식, 일식, 중식 자격증을 모두 가진 요리사를 어렵게 구했다.</p><p>“요리사님, 부엌에 재료를 부려놓았습니다. 부디 맛있는 요리를 해주세요!”</p><p><br /></p><p>요리사가 답했다.</p><p>“아쉽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p><p><br /></p><p>당황하여 내가 되물었다</p><p>“준비라뇨? 한식 일식 중식 자격증. 이미 충분하시잖아요.”</p><p><br /></p><p>요리사가 답했다.</p><p>“재료가 한식용이 아닙니다. 일식용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중식용 재료도 아니에요. 저는 준비가 다 되어야만 요리를 합니다.”</p><p><br /></p><p>기가 차 요리사를 내쫓고, 인터넷에 레시피를 찾아 내 나름의 요리를 한다.</p><p>요리를 하며 혼자 읊조린다.</p><p><br /></p><p>‘준비를 하고 덤비는게 아니다. 덤비면서 준비되는거야.’</p><p><br /></p><p><img src="https://nwna.or.kr/data/editor/2605/cb66712651cbb2155200498ce15ea732_1779631848_904.jpg" title="cb66712651cbb2155200498ce15ea732_1779631848_904.jpg" alt="cb66712651cbb2155200498ce15ea732_1779631848_904.jpg" /><br style="clear:both;" />Van Gogh, V. (1890). First steps, after Millet [Painting].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NY, United States.</p>]]></description>
<dc:creator>한상도</dc:creator>
<dc:date>Sun, 24 May 2026 23:10: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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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노자의 무위통치와 개헌에 대해 ㅋㅋㅋ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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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p>이번 새말새몸짓 유튜브에서 진행되는 최진석 교수님의 노자 강의가 기대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자는 다소 지루한 면이 있었다. 교수님 잘못이 아니다. 그냥 내 취향, 관심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노자 강의는 짱짱 기대된다.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노자가 제시한 무위 사상이다. 어쩌면 이 기대감은 최근 개헌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노자의 무위 통치는 유토피아처럼 들리곤 했다. 이번 헌법 개정 관련 이슈에 관심을 갖다보니 영국과 미국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두 나라가 무위통치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p><p><br /></p><p>영국의 헌법은 미국이나 한국처럼 성문화되지 않은 불문헌법 체계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영국에 헌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대헌장, 권리장전 같은 기본 문서들을 바탕으로 하여 수백년 동안 축적되어 온 법원의 판례와 헌법적 관행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였여 국가의 근본 규범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국의 헌법은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특정 시점에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모여 인위적으로 설계한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치열한 투쟁과 타협의 결과물들이 쌓여서 형성된 자생적 질서다. 이 대목에서 영국의 불문헌법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생적 질서 그리고 노자가 말한 무위 통치와 비슷해 보인다. </p><p><br /></p><p>물론 영국의 불문헌법 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처럼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새롭게 설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 사회는 건전하게 토론하고 공론을 모으는 분위기를 지금처럼 유지시킬 수 있다면, 현재와 미래의 헌법적 감각은 자연스럽게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는 법전에 하나하나 명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영국의 왕족이 의회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전통, 내각이 하원의 신임을 잃었을 때 스스로 사퇴하는 관행은 모두 성문법이 아니라 관행이 만든 질서다. 앨런 라이언의 &lt;정치사상사&gt;가 국가를 지탱하는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습속, 시민적 문화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p><br /></p><p>영국 헌법의 핵심 원리는 의회 주권에 있다. 의회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고, 의회가 만든 법률을 무효화할 수 있는 상위의 성문 헌법재판소 같은 기관이 없다. 다시 말해, 고정된 헌법적에 국가의 미래와 역동성을 옭아매지 않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가치들은 선출된 의회라는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때그떄 유연하게 제도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이는 노자의 무위 통치와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최진석 교수님이 5.18을 헌법 전문에 새기는 것에 대해 반대하시는 주장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가치는 고정된 활자로 박제시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습속 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p><p><br /></p><p>반대로 미국의 헌법은 영국처럼 자연스럽게 이룩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헌법은 영국과 비슷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헌법은 1992년 제 27조 수정안을 통과시킨 이후로 2026년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개헌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복잡다단한 사회를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성문법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운영은 영국의 판례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p><p><br /></p><p>미국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사회가 변할 때마다 개헌을 통하여 헌법을 뜯어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식의 불문헌법처럼 시대적 상황과 요구에 맞춰서 기존 헌법 조문을 유연하게 해석하는 방식을 택했다. 18세기에 작성된 '부당한 수색과 압수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조항을, 현대에는 디지털 프라이버시 보호'의 근거로 확장하여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긴 시간 동안 사법부의 판결과 해석이 쌓이면서 미국 헌법은 개헌을 하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아 숨쉬는 것이다. </p><p><br /></p><p>물론 모든 국가가 이러한 길을 걷는 건 아니다. 최근 프랑스와 독일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성문 헌법을 개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개헌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의 뿌리에는 합리론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설계를 통하여 사회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유기체를 통제하고 구축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에 가깝다. </p><p><br /></p><p>최근 일본 또한 기존 헌법에 의문을 품고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보수 세력은 현행 헌법을 승전국인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게 강압적으로 주입한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현행 헌법은 일본 사회 기저에 흐르는 천황 중심의 고유한 전통이나 정통성이 헌법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 고유의 역사관과 정통 정신을 반영한 자주 헌법을 자신들의 손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에 대한 대안이 과거 메이지 헌법이다. 메이지 헌법은 성문헌법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일본 고유의 역사적, 종교적 감각을 반영하고 있으며,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전쟁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과거의 메이지 헌법이 현행 헌법보다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라고 볼 수 있다. </p><p><br /></p><p>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전후 수십 년 동안 개헌을 감행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일본 국민들은 과거 군국주의가 남긴 공포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상사태라는 명분 아래 천황의 권위 뒤에 숨어 있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과 자유를 희생시켰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과거 일본은 영국식 자생적 질서 같은 우회로를 택했다. 일본 헌법 제 9조는 군대 보유를 문서상으로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 헌법 조문을 고치는 게 아니라,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력 행사는 위헌이 아니다." 라는 해석을 통하여 자위대를 창설했다. 나아가 2014년 아베 신조는 헌법을 단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은 상태로, 동맹국인 미국이 공격받았을 때 일본이 대신 반격할 수 있는 권리인 집단적 자위권을 합법화했따. </p><p><br /></p><p>이번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 정권은 이러한 우회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 개헌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따. 이들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그동안 보수 진영이 열망해 왔던 메이지 헌법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대규모 자연재해나 외부 무력 공격 등 예기치 못한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민의 기본권을 일시적으로 제한시킬 수 있는 긴급사태 조항을 명문화하겠따는 것이다. 이는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개조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물론 일본의 개헌 장벽은 까다롭다. 보수 진영이 의회 의석을 상당수 장악했어도 국민투표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본의 유권자들은 우리나라 유권자들처럼 헌법 개정이라는 이념적인 투쟁 그 자체보다, 물가, 고령화, 경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p><p><br /></p><p>이러한 풍경을 들여다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음을 마주할 수 있다. 정치권의 요구대로 헌법을 뜯어고치고 정치 구조를 새로 설계한다고 해서, 우리의 실질적인 살림살이가 더 나아질까? 개헌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우리 이웃들과 더 따뜻하고 친근한 공동체적 연대를 맺을 수 있을까? 여기서 나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에 따르면 소수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주도한 인위적인 개헌안 그 자체보다 노자가 설파한 무위 통치 그리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강조한 자생적 질서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말이다.</p><p><br /></p><p>물론 이 길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수백 년 동안 주체적인 관습과 서서히 무르익은 민주적인 습속을 축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글자를 바꾸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은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 또한 교수님처럼 5.18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는 걸 반대하는 이유다. </p><p><br /></p><p><br /></p><p><br /></p>]]></description>
<dc:creator>서우</dc:creator>
<dc:date>Sun, 24 May 2026 10:44: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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